잊혀진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얼마든지 잊혀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건 온전히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고, 나중에 얼마나 빨리 다시 제자리를 찾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왕이면 입대 전의 그 자리가 아니라, 뭔가 좀 더 새로운 자리였으면 좋겠고, 군에서의 훈련이나 경험들이 좋은 밑거름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만드느냐 만들지 못하느냐는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고 봅니다. 다른 동기들도 그렇겠지만, 그래서 저에게는 이 1년 9개월이라는 시간이 무척이나 소중합니다. 이 기간 동안 저 자신의 정신적ㆍ육체적 한계점을 알아보고 싶고, 그 한계에 부딪쳐보고 싶습니다.---「김태평 인터뷰」중에서
동기들은 대개 여덟이나 아홉 살, 많게는 열 살까지 차이가 납니다. 동기이면서 또 형 노릇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물이 스며들 듯이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을지, 저한테는 그게 숙제입니다. 우선은 가장 가까이서 생활하는 같은 생활실의 동기들부터 진짜 동기라는 느낌이 들 만큼 가깝게 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고 유명하다는 게 여기서는 짐이 됩니다.---「김태평 인터뷰」중에서
꼭 초코파이 때문에 헌혈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헌혈을 하지 못했고, 초코파이도 먹지 못했습니다. 729명 가운데 저 혼자만 그랬습니다. 입대 후 2주 동안 일어났던 일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고, 초코파이 2개를 혼자 다 먹어 치우는 동생 성진이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 (쌍둥이 가운데 형 정성우 훈련병의 말)
처음에 저는 형이 헌혈을 하지 못했다는 걸 몰랐습니다. 일란성 쌍둥이인데 저는 되고 형은 안 되는 이유가 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 혼자 초코파이 2개를 다 먹은 건 욕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욕심 때문이 아니라, 받은 초코파이는 그 자리에서 즉시 먹어 치우라는 교관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 (쌍둥이 가운데 동생 정성진 훈련병의 말)---「쌍둥이 형제 정성우ㆍ정성진 인터뷰」중에서
김태평, 아니 현빈이 부른 [그 남자]가 1137기 기수가로 정해졌다.
처음에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계속해서 동기들이 부르는 그 노래를 듣고 있자니, 정말로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습니다. 그 노래가 그렇게 군가 스타일로 불릴 만한 노래가 아닌데, 군가로 돌변하니까 그것도 참 이상했습니다. 제가 불렀던 노래와는 전혀 다른 노래 같기도 하고요.
상상해보라. ---「그 남자]를 군가식으로 격렬하게 박수를 치며 부르는 모습을.
한 남자가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 남자는 열심히 사랑합니다. …….---「김태평 인터뷰」중에서
3주차 후반에 실시된 개인화기 3차 사격 테스트에서 김태평은 특등 사수가 되었다. 주간 사격 20발 가운데 19발, 야간 사격 10발 가운데 10발 전부를 명중시킨 것이다. 일발필살을 강조하는 해병대에서 특등 사수가 된다는 것은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퇴소식 때 별도의 포상도 받는다.
저도 최선을 다해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체력으로 하는 훈련들은 솔직히 다른 동기들보다 더 잘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격만은 차분하고 여유 있게 하면 잘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남들보다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무언가 제대로 하고 있다는 걸, 저 자신이나 저를 지켜보는 다른 동기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김태평 인터뷰」중에서
바로 몇 달 뒤에 받게 될 미국 시민권조차 뒤로한 채 해병대로 달려온 훈련병도 있다. 철인소대인 9소대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김홍순 훈련병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난주에 어머니 편지를 받았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가 직접 손으로 쓰신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정말이지 눈물을 참기가 어려웠습니다. 내용은 사실 별것이 없었습니다. 몸조심해라, 몸조심해라, 그 말만 반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제발 포병이든 보병이든 그런 건 제 마음대로 하되, 연평도만은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김홍순 훈련병은 1지망에 포병을, 지원 지역으로는 연평도를 써냈다. 적의 포탄이 떨어져 불바다가 되었던 곳, 민간인이 죽고 다치고 해병대 선배들이 또한 죽고 다친 곳, 연평도고 가서 포병으로서 그곳을 지키고 또다시 적이 공격해오면 반드시 직접 복수하겠다는 것이 그가 해병대를 지원하게 된 동기였다.---「김홍순 인터뷰」중에서
윤사헌
오늘 래펠 훈련을 할 때 한 동기가 정말로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면서 저더러 손 한 번만 잡아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당연히 손을 꼭 잡아줬습니다. 그 덕분인지 그 친구, 잘 뛰어내렸습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 격려와 지원을 해주는 존재, 그게 바로 해병대 동기 아닌가 싶습니다.
김홍순
저는 요즘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습니?. 그래서 밤에 잠도 잘 자지 못합니다. 그럴 때마다 동기들이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여기저기 주물러주기도 합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여기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동기들밖에 없습니다.
김태평
아플 때, 힘들 때, 다시 말해서 무언가 균형이 깨졌을 때 이를 다시 회복시켜주는 존재가 동기 아닌가 싶습니다. 마치 저울추처럼 말입니다.---「동기애에 대한 윤사헌, 김홍순, 김태평 인터뷰」중에서
못 버틸 줄 알았습니다. 비도 많이 오고, 춥기도 하고……. 그런데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은 순간들이 올 때마다 주변을 둘러보면 저만 힘든 게 아니고 다른 동기들도 똑같이 힘들어하고 있는 겁니다. 그걸 보면서 참았습니다. 동기들이 다 참고 있는데 저만 쓰러질 수는 없잖습니까? 그렇게 끝내고 나니까, 뭔가 개운하고 시원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비를 맞으면서 새벽부터 정신이 확 깨어나는 그런 느낌 말입니다.---「김태평 인터뷰」중에서
8년 전 캐나다로 유학 간 윤사헌 훈련병은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있다.
원했다면 캐나다 영주권을 취득해서 군대 문제를 얼마든지 피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뿌리를 잊지 말라고. 대한민국 사람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지 말라고. 저 역시 한국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싶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들. 제가 생각하는 해병이란 그렇습니다. 그 정신을 배우고자 과감히 해병대를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윤사헌 인터뷰」중에서
‘김태평’이라는 본명 대신 고등학교 때부터 사용했다는 예명 ‘현빈’이 스스로에게도 더 익숙한 그였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김태평이 아니라 현빈으로 불렀다. 심지어 부모님조차. 그러다가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10년 넘게 거의 사용하지 않던 김태평이란 본명을 사용하게 된 것이었다. 입대 초기에 현빈과 김태평 가운데 어떤 이름이 더 자연스러우냐고 묻자, 대답을 얼버무린 채 이천백일번이 가장 익숙하다고 대답하던 그였다. 그러던 그가 이제는 김태평이란 이름을 되찾았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배우 현빈이 아니라 자연인 김태평으로 군 생활을 하고 싶다던 그가 김태평이라는 본명에 조금씩 익숙해져가는 듯 보였다.
주어진 모든 일을 혼자 힘으로 처리하고, 남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고, 남들과 똑같이 몸을 혹사하며 훈련을 하고, 남들과 똑같이 휴가도 가고, 남들과 똑같이 월급도 타는 그런 사람이 된 겁니다. 물론 여전히 다른 동기들과 똑같이 자유롭지는 않지만, 전에 느껴보지 못한 자유를 느낍니다. 김태평의 이름으로, 남은 1년 7개월을 성실하게 살아갈 겁니다.---「김태평 인터뷰」중에서
3월 9일, 훈병 XXX놈들 중 몇 놈이 흡연을 해 샤워 후 단체 기합.
3월 10일, 아무 생각 없이 안내문 보고 있는데, 엥? 옆에 김태평 훈병이었다. 과자가 너무 먹고 싶다.
3월 11일, 머리 밀었다. 수염 길이보다 짧아짐.
3월 12일, 아침에 일어나는 것 쉽다. 아무것도 아니다. 6주 너무 기대되고 재밌을 것 같다.
3월 16일, 너무 추워……, 깔깔이 입어야지. 가족끼리 외식하고 싶다.
3월 17일, 오전 3시~4시 근무(불침번). 다음 차례는 (동생) 성진이. 중식(으로 나온) 사제 메로나, 캡 쩝…….
3월 18일, 오늘 (실내) 교육만 받음. ㅠ 지겨워, 답답해. 하지만 견디자.
3월 26일, 오늘따라 유난히 식욕 참기 힘듦. 어머니 닭도리탕 먹고 싶다.
3월 31일, 마지막 4차 사격 15발! 그래도 피날레 멋지게!---「정성우 훈련병의 해병 일기」중에서
건장한 편이 아닌 그에게 군 입대 자체가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입대를 위해 신검을 받았을 때는 체중 미달로 3급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끌려서 군대에 가서는 안 된다는 게 오래전부터 저희 아버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3급 판정을 받고 돌아온 정성록 이병은 전에 없던 새로운 목표 하나를 세웠다. 바로 해병대에 입대하는 것. 그날부터 운동을 시작했고, 유도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모님 모르게 운동을 하고 체력을 기르며 해병대 입대를 준비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에게 빨간 명찰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자기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겠다는 그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니까.---「정성록 인터뷰」중에서
제가 심리적으로 비교적 잘 적응을 해나가고 훈련도 나름대로 열심히 받다 보니까 동기들 사이에서 하나둘씩 제게 질문을 하는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열심히 설명도 해주고 이해도 시켜주려 했지만, 저도 모든 걸 다 알고 있거나 100퍼센트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럴 땐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얘들아, 나도 군대는 처음이야!’---「김태평 인터뷰」중에서
어머니!
저는 지금 제가 그렇게나 오고 싶어 하던 바로 그곳에 와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북한군의 포격을 받은 바로 그 섬,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떵 해병대 선배들이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운 그곳, 철모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른 채 자주포 기지로 달려가 적의 해안에 대응 포격을 가한 용감한 대한민국 해병대 선배들이 지키고 있는 연평도에 말입니다. 제발 그곳만은 가지 말라던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를 뿌리치고 기어이 연평도에 지원하여 포병으로 이곳에 오고야 말았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미국 시민권을 뒤로한 채 애틀랜타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포항으로, 포항에서 장성으로, 장성에서 인천으로, 그리고 다시 인천에서 이곳 연평도로, 참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오직 북한이 도발한 그곳을 내 손으로 지키겠다, 그들이 다시 도발해오면 백 배, 천 배로 갚아주겠다는 그 생각 하나만으로요.(……)
꿈같은 휴가를 마치고 다시 인천으로 와서 배를 타고 연평도로 향했습니다. 멀미를 하는 체질이 아닌데도 배에 있는 동안 내내 속이 불편했습니다. 긴장을 많이 한 탓이었을 겁니다. 포항의 훈련소에 처음 내려가던 날보다 앞이 더 막막하고, 착잡한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나 가고 싶어 하던 섬이었는데, 4박 5일의 휴가를 마치고 막상 배를 타니 내가 왜 연평도를 지원했던가, 후회를 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과 후회도 잠시, 안개 속에서 연평도의 모습이 눈에 점점 들어오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포격을 당해 불에 탄 산과 파괴된 민가를 보면서 내가 왜 지금 여기에 왔는지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작은 섬에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건너가 바로 북한 땅이기 때문에 오늘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는 대한민국 해병으로서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작은 섬을 지키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철인소대의 혹독한 훈련도 이겨냈으니 이제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이제 자랑스런 대한민국 해병이랍니다.
2011년 6월 11일
연평도에서 아들 홍순이가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