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이라는 단어는 내가 아닌 제삼자의 시선을 뜻한다. 객관적으로 삶을 바라본다는 것은 즉 남의 기준으로 본다는 말이 된다. 물론 객관적인 관점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시선에 갇히면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남에게 끌려다닐 가능성이 크다.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남들의 기준에 맞추는 삶,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삶을 좇는 허망한 인생이 되고 만다. 그런 인생은 충분히 살았다. 앞으로의 인생만큼은 주관적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자기만의 기준과 관점으로.
--- p.7-8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거나 멍하니 생각에 잠긴 옆얼굴을 보고 있자면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이 사람,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수없이 봐온 사람임에도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옆얼굴엔 그(그녀)의 이면이랄까 본모습이랄까, 전혀 다른 얼굴이 있다. 정면에선 보이지 않던 슬픔이나 매력, 혹은 말 못할 비밀. 그에게도 내가 모르는 모습이 많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고 놀란다. 그런 이유로, 한쪽 면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될 일이다. 타인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볼 때도.
--- p.18
또 하나 추천할 안주는 책이다. 함께하는 술자리엔 대화가 있지만 혼술엔 대화가 없다. 그 빈자리를 책이 대신한다. 책을 읽는 것은 상대의 얘기를 듣는 것이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은 내 대답인 셈이다. 그렇게 내가 감히 만나볼 수 없는 사람들과 술자리를 함께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즐거움은 배가 된다. 지난번엔 다자이 오사무와 얘기를 나눴고, 오늘은 헤밍웨이와 얘기를 나눈다. 헤밍이 형은 엄청나게 큰 청새치와 며칠 동안 대결한 얘기를 들려준다. 하여간 낚시꾼들의 구라란 대단하다. 입이 떡 벌어진다. 그나저나 미국 사람이 한국말을 참 잘하네요. 형, 어디서 한국말 배웠어요? 파고다 어학원? 아아, 취했네, 취했어. 취하니까 얼마나 좋아요.
--- p.54-55
주인공은 연극, 영화, 소설 따위에서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을 말한다. 인생이 한 편의 영화라고 치자. 이 인생의 중심은 누구인가. 수많은 사건에 고민하고 고통받고 울고 웃는 주체는 누구인가. 누구의 눈으로 보고, 누구의 귀로 듣고, 누구의 머리로 생각하는가. 내가 중심이 아니라면 이렇게 생생할 리 없다. 이 고통, 이 불안, 이 슬픔. 차라리 남의 이야기라면 좀 더 편하게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을. 내가 주인공이라는 증거다.
--- p.89-90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세상의 원리는 단순한 경기와 같아서 개인의 노력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고 믿었다. 나이 들어서도 별 볼 일 없이 사는 어른들을 보면 노력을 하지 않으니 저 모양으로 사는 거라 생각했다. 패배자들. 술에 취해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세상 탓, 대통령 탓이나 하는 무능한 인간. 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는 열렬한 노력 신봉자였다. 환경을 탓하는 건 비겁한 변명이고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세월이 흘러 나는 어른이 됐다. 내가 비웃던 어른들처럼 별 볼 일 없는 어른이.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이 모양이다. 아무래도 노력이 부족했던 걸까.
--- p.98
한때 인생은 끝없는 싸움이라 생각했다. 인내하고, 한계까지 나를 밀어붙이고, 뭔가를 극복해서 승리를 거머쥐는. 뭐 대충 그런 게 인생이라 여겼다. 이제는 싸우지 않기로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도 않는다. 인생의 커다란 문제들은 해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저 어떻게 하면 맘에 안 들고 답도 없는 이 인생과 잘 지낼 수 있나 고민할 뿐이다.
--- p.192
작거나 말거나, 사람은 생긴 대로 사는 게 자연스럽다. 내겐 이게 맞다. 내게 인간관계는 늘 어려운 숙제였다. 어려우니까 적당히 하기로 했다. 인간관계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며 힘들어하느니 외톨이가 되겠다는 담담한 마음으로 산다. 그런 마음으로 살면 인간관계에 크게 휘둘리지 않게 된다. 요즘 인간관계에 필수라는 ‘카톡’도 쓰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카톡 좀 깔라는 소리를 듣지만 여전히 깔 생각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피곤해서. 필요 이상으로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느낌은 피곤 그 자체다.
--- p.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