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세요!”
마치 의자에 앉은 수고양이를 내치듯 그는 툭 내뱉었다.
“네?”
죄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퐁투아즈는 자리로 돌아와 여자 맞은편에 앉은 뒤,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두 손을 모은 채, 상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힌다.
“도망치란 말입니다.”
“뭐라고요?”
“내 말 잘 들으십시오, 부인. 나는 당신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 어서 당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안녕히 가세요. 난 이 문제에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앞으로 평생을 감방에서 썩을 거란 말입니다. 자자, 어서 떠나요!”
맞은편의 여자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경찰관은 버럭 신경질을 낸다.
“내 참, 어이없어서! 당신은 그놈의 남편이란 작자와 뭐가 영 안 맞아돌아갔던 거야, 그러다가 하루는 그를 창문에서 밀어 떨어뜨린 거라고, 좋다 이거야…… 근데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경찰은 감쪽같이 속아넘어갔지. 이봐요, 아줌마, 내 분명히 말하건대 당신은 완전범죄에 성공한 거요…… 어쨌든 대단한 일을 해치운 셈이지!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난 다음 자진해서 이렇게 납시다니…… 기껏 완전범죄를 행하고 이제 와서 철창신세를 지시겠다? 내 경찰생활 통틀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외다!”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인 여자는 새로운 환멸에 부닥치며 고개를 떨군다. 퐁투아즈는 그녀 쪽으로 잔뜩 몸을 기울이며 이렇게 말한다.
“애당초 나를 찾아오지 말았어야 하는 겁니다…….”
여자가 갑자기 고개를 쳐든다. 그녀의 입술과 경찰관의 갈라터진 입술이 어쩌다 서로 스친다.
“저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요.”
--- p.53
매년, 기일을 앞둔 며칠 전에 여자는 규칙적으로 하나씩 늘어나는 죽은 남편의 사진과 맞닥뜨려야만 했다.
지미의 그 사진은―원래 사이즈 혹은 조금 확대한 상태로 흑백 복사된 증명사진―집 안 구석구석, 예기치 못할 장소에서 불쑥불쑥 얼굴을 내밀며 여자를 놀라게 했다. 예컨대 부엌에서 붙박이 찬장 문을 여는 순간, 문짝 안쪽에 압정으로 고정된 A4용지 크기의 남편 얼굴이 불쑥 튀어나오는 식이었다. 찻잔을 집어들면, 거기 받침접시 한복판에 찻숟갈 크기의 남편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형으로 빙 둘러가며 찍힌 R?publique fran?aise(프랑스 공화국)라는 우체국 소인의 일부가 복사된 남편의 얼굴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가루커피통 속에 계량컵을 담갔다가 빼내면 아라비카 수북한 꼭대기에 지미의 얼굴이 얹혀 있었다. 그러면…….
그러면 여자는 커피통 뚜껑을 그대로 닫고, 잔을 내려놓으며, 찬장 문을 닫을 뿐, 무슨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지 영문을 몰랐다. 해가 거듭할수록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갔다. 도대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 마음에 부드럽게 웃어넘겼지만, 이후부터는 조금씩 걱정되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다 최근 들어서는 거의 고문수준으로 치달았다. 뭐든 들어올리거나 집어들면―예컨대 가구 위에 놓인 어떤 물건이든 가리지 않고―그 아래에서 죽은 남편의 얼굴과 맞닥뜨리고 마는 것이었다.
집을 비우거나 잠을 잘 때, 가위로 잘게 자른 사진들이 색모래 병 속에까지 감춰져 있는가 하면, 심지어 속옷에까지 그것들이 숨겨져 있었다. 마침내 여자는 자신이 살해한 남자의 망령이 그렇게 불쑥 되살아나는 걸 보기 두려워, 집안 물건 그 어느 것에도 손을 대지 않게끔 되었다.
--- p.147
처음, 12층에서 추락하는 망나니 남편과 마지막, 침대 위에 몸을 던진 괴짜 경위가 ‘양팔을 옆구리에 붙인’ 동일한 자세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머나먼 수평선과 6차선 해안도로, 질주하는 전차 그 어느 것도 12층 높이에서 곤두박질치는 수직의 중력을 흩뜨리지 못한다. 이런 유의 이야기가 만약 재능 없는 작가의 손에서 빚어졌다면 지금 우리 손에는 진부한 운명론을 그저 그런 수사로 장식한 소설책 한 권이 들려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 퇼레라는 기발한 (『자살가게』를 차릴 정도의 기발함이라니!) 작가를 만난 건 분명 행운이다. 그 흔한 형이상학적 담론이나 감상적인 스토리에 기대지 않고도, 운명에 대해 더없이 섬뜩한 경고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의식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음을 느낄 때, 그것은 결코 만만히 볼 운명이 아니라고. 그것은 그대의 존재에 작용하는 ‘중력’이라고…….
--- 역자후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