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핀은 피부과 전문의의 협조를 받아, 색소 변화를 일으키는 약을 먹고 강한 자외선에 온몸을 쪼였다. 이 과정에서 심한 고통을 겪었지만 그는 마침내 ‘해냈다.’ 마지막 마무리 작업으로 머리를 삭발하자 정말 중년의 중후한 흑인이 되었다. 그는 딥 사우스, 특히 미시시피로 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 책은 일기 형식을 띠며, 1959년 10월 28일부터 시작된다. 흑인이 되자는 생각이 맨 처음 그의 머릿속에 똬리를 틀기 시작한 날이었다. 일기는 12월 15일, 바로 긴 여정을 마치고 텍사스 맨스필드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 다시 한 백인 가정의 남편으로, 아버지로 살기 시작한 날 끝난다. ……장담하건대 이 책이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 「스터즈 터클의 ‘서문’」 중에서
흑인. 남부. 이런 것은 세부적인 문제일 뿐이다. 여기에 담긴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파괴하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기 자신마저 파괴되는) 사람들에 관한,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다. 또한 이 이야기는 박해받고, 빼앗기고, 미움 받고, 두려움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독일에 있는 유대인일 수도 있고, 미국 내 흩어져 사는 멕시코 사람일 수도 있으며, 그 어떤 ‘열등한’ 집단에 속한 어느 누구일 수도 있다. 세부적인 것만 다를 뿐, 결국은 같은 이야기다. --- 「머리말」 중에서
나는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이 삶은 어느 날 갑자기 신비하고 두려운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흑인이 되기로 결심하는 순간, 인종 문제 전문가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흑인의 진정한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p.20
“내 피부색에 관계없이 존 하워드 그리핀으로 대해 줄까요? 아니면 내가 여전히 같은 사람인데도 어느 이름 없는 흑인으로 대할까요?” “지금 농담하십니까? 아무도 당신한테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을 보는 순간 바로 ‘아, 흑인이구나.’ 할 것이고, 그러고 나면 당신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싶은 것도 없을 겁니다.” --- p.24
완벽한 변신이었다. 하지만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저 변장하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게 아니었다.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의 육체 속에 갇혀 버렸다. 나랑은 조금도 비슷한 구석도 없고 아무런 친밀함을 느끼지 못하는 다른 존재 속에 갇혀 버린 것이다. 과거의 존 그리핀은 존재의 흔적조차 남지 않고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게다가 마음속 깊은 곳까지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나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 p.34
조금 전까지 피곤한 기색이 감돌던 파란 눈에 날카로운 빛이 번득이더니 중년 여자가 버럭 화를 냈다. “왜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죠?”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른 백인들이 목을 길게 빼고 나를 쳐다보았다. 누구도 뭐라 하는 이는 없었지만 다들 적대감으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나는 흠칫 놀랐다. --- p.51
검은 손을 보고 있으니 아내와 아이들의 이미지가 더욱 하얀 빛을 띠며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들의 얼굴, 살갗이 흰색으로 가물거렸다. 전혀 다른 삶에 속한 사람이었고 지금의 나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외로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 p.69
나는 머릿속으로 단어를 조심스레 하나씩 골라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뭐 기분 상하게 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내 피부색이 여자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다. --- p.104
“그러니까 백인 여자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해야 해요. 사실 땅바닥을 보거나 다른 데를 봐야죠.” …… “영화관 앞을 지나다 보면 바깥에 포스터를 붙여놓잖아요. 그것도 쳐다보면 안 돼요.” “그게 그렇게 나쁜 짓인가요?” 그가 그렇다고 답하자, 또 다른 남자가 말했다. “분명 누군가 당신한테 이런 식으로 말할 거예요. ‘이봐 거기, 대체 뭐 때문에 그 백인 여자를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 건데?’” --- p.118
이들이 나를 차에 태워준 이유는 얼마 안 가서 분명해졌다. 두 사람만 제외하고는 모두 포르노 사진이나 책을 집어 들듯 나를 차에 태웠다. 단 이 경우는 말로 하는 포르노라는 것만 달랐다. 겉치레일망정 흑인에게는 자존감이나 인격 같은 것도 보일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다. 시각적인 요소가 개입되었다. 우선 밤이고 차 안이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람은 어둠 속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법이다. 어둠은 마치 익명성이 보장되는 것 같은 착각을 안겨주며 밝은 대낮에 비해 자기를 드러내기 쉽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모든 것을 툭 털어놓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치심도 없이 미묘하게 접근해 오는 이도 있었다. 모든 이가 흑인의 성 생활에 대해 병적인 호기심을 드러냈으며 흑인에 대해 정형화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흑인은 성기가 엄청나게 크고, 매우 다양한 성적 경험을 가졌으며 지칠 줄 모르는 섹스 머신이라고 여겼다. 백인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 ‘특별한’ 행위를 흑인은 모두 다 경험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 p.165
나는 백인으로 이 눈망울을 보는 것도 아니고 흑인으로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부모가 되어 이 눈망울을 보았다. 이 아이들이 다른 모든 아이와 닮았듯이 피부색이라는 겉모습만 빼면 모든 점에서 우리 아이와도 닮았다. 그럼에도 이처럼 어쩌다 생긴 우연적인 요소, 모든 특성 중에서 가장 하찮은 피부색소라는 특성 때문에 이들은 열등한 지위로 낙인찍힌다. 내 피부가 영원히 검은 색이라면 사람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내 아이들도 이처럼 콩으로 연명하는 미래 속에 가둬버릴 것이다. --- p.213
경찰은 내게 다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는 성공적으로 백인 사회에 돌아온 것이다. 다시 일등 시민이 되었으며, 모든 카페와 화장실, 도서관, 영화관, 콘서트, 학교, 교회 문에 일시에 활짝 열렸다. 한동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기쁨에 가득 찬 해방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나는 길 건너 식당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 있는 백인 옆 좌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웨이트리스가 나를 보고 밝게 웃었다. 이건 기적이었다. 음식을 주문하자 식탁 위에 음식이 차려졌다. 이 역시 기적이었다. 나는 화장실에 갔다. 아무도 나를 제지하는 이가 없었다.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거기서 뭐하는 거야, 검둥이?”라는 말을 하는 이도 없었다. --- p.228
우리는 인종차별을 하는가? 아니면 그런 일이 없는가? 이 점을 꼭 알아내야 했다. 흑인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백인이 이 현실에 관해 어떤 것 하나라도 이해하려면 어느 날 아침 흑인 피부색을 하고 깨어나는 수밖에 없다고.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