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음을 틈타 무엇인가를 손에 넣은 도둑들처럼, 스타인과 그의 긴밀한 동지는 그토록 소망하던 보물을 눈에 띄지 않게 숨겨두었다. 그들은 소문나지 않게 운반에 필요한 상자들을 구한 다음,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며 약 7천 종의 완전한 문서와 약 6천 종의 단편적인 문서들을 포장했다.
오렐 스타인이 실크로드의 보물을 향한 경주에서 위대한 승자가 되어 소중하고 값진 화물과 함께 둔황을 떠나던 장면은 중국의 어느 젊은 시인에 의해 이렇게 묘사되었다.
"저녁이 되어 스타인이 인솔하는 대상들은 열두 개의 큰 상자를 싣고 길을 떠났다. 그때 마지막으로 그들은 저무는 핏빛 태양, 선혈이 흐르는 한 나라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pp. 188~189
1907년 3월 12일 동양학자 겸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은 얼음처럼 차가운 모래 폭풍을 무릅쓰고 둔황에 당도했다. 도착하자마자 그의 귀에도 몇 년 전 르 코크가 들었던 소문이 전해졌다. 즉, 모가오 동굴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도교 승려 왕 위엔루가 1900년 6월 22일 우연히 어느 동굴의 벽 뒤에서 엄청난 분량의 옛 문서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 훗날 전문가들은 이 고대 오아시스 도시에 있는 석굴 사원들을 ?사막의 미술관?으로 부르거나 ?세계에서 가장 풍성한 박물관 중 하나?로 규정했다. 어쨌든 이곳에는 3천여 개의 초상이나 불상이 소장된 730여 개의 석굴이 있으며, 이 점에서 중앙아시아에 있는 비슷한 시설들 가운데 최대 규모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곳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석굴 중 한 곳에서 세계 최고(最古)의 문서고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pp. 176~177
대부분의 보물 추적자들은 전문 지식을 갖춘 고고학자가 아니라 모험을 좋아하는 일반 학자나 탐험가들이었다. 그들의 여행은 '왕립지리학회'같은 단체들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 사적인 동기를 논외로 하면, 그들은 강대국들의 유급조수이자 식민정책의 공범들이었다. 특히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보물을 손에 넣고자 서둘러 돌아다니는 탐색 활동의 와중에도 해당지역의 지형을 세심하게 측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벤 헤딘도 무수한 모험담뿐만 아니라 다량의 중앙아시아 지도를 후세에 남겼다.
스벤 헤딘은 평생 동안 모험을 추구했던 사람이다.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은 멸망한 도시들과 숨겨진 보물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는 중국의 승려 법현과 현장이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쓴 여행기도 최초의 영역본으로 읽었다. 두 승려는 1천수백 년 전 인도로 가기 위해 중국의 사막을 가로질렀다. 두 사람의 기록은 서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행자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와 많은 점에서 일치한다. 이 세권의 책에는 한결같이 소름끼치는 폭풍, 망령들의 목소리 그리고 사막의 길잡이 노릇을 해주는 음산한 해골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그 사막에는 익히 알려진 '타클라마칸'이라는 이름이 주어진다. 이 이름은 대게 '일단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설명된다.
---pp. 136~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