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말부터 1990년 초반까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덕분에 그가 쓴 대부분의 작품이 한국어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에 대한 연구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체코 출신의 프랑스 작가라서 국내 체코 문학이나 프랑스 문학 중 한 분야에만 정통한 학자들이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쿤데라의 작품 중에서 체코적인 배경과 테마를 많이 다루고 있는 소설 『농담』, 『우스꽝스러운 사랑』, 『생은 다른 곳에』, 『이별의 왈츠』, 『웃음과 망각의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과 희곡 『야곱과 그의 주인』에 대해 자세히 분석하였다.--- pp.7-8
1986년에 쓴 제6부 「63개의 단어들」은 『소설에 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었다. 밀란 쿤데라는 여기에서 그의 소설 여기저기에 등장하고 또 자신의 소설 미학을 표현하는 주요 단어들(key words)에 대해 설명한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이렇다. 밀란 쿤데라가 자신의 작품을 왜곡하여 번역하는 것을 처량하게 감시하는 것을 본 잡지 편집자 친구가 소설에 대한 개인 사전을 쓰라고 충고했다. 그래서 쿤데라는 63개의 주요 단어를 골라 사전처럼 쓰게 되었다. 쿤데라는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비롯하여 몇몇 소설에서도 주요 단어들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쿤데라가 즐겨 쓰는 몇몇 주요 단어를 살펴보자.--- p.55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는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다. 여기에서 헬레나의 모순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헬레나는 남자 동료와 부정행위를 저질렀던 한 여성기술자를 언급하며 그녀를 창녀라고 증오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루드빅에 빠져 지방 출장까지 가서 그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심지어 루드빅을 ‘여보’라고 부르며 애정 어린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헬레나의 모순적인 성격과 도덕관이 여기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아마 『농담』의 등장인물 중 가장 모순적인 인물일 것이다. 어쨌든 사랑 없이는 못 사는 여자가 헬레나이다.--- p.84
『농담』에서 보여준 밀란 쿤데라의 다성악적 이야기 기법의 소설 미학은 우리들로 하여금 아주 구체적이고 역동적으로 개인과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게 한다. “소설의 정신은 복잡성의 정신이다. 모든 소설이 독자들에게 ‘사물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그의 농담은 다양성의 정신이다.--- p.120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모티프는 특히 사랑의 부조리한 장면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주요한 키워드다. 『농담』, 『웃음과 망각의 책』, 『생은 다른 곳에』, 『이별의 왈츠』 등에서 우리는 쉽게 이 테마를 찾아볼 수 있다.--- p.123
그의 다른 소설들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웃음과 망각의 책』, 『생은 다른 곳에』, 『이별의 왈츠』 등 거의 모든 곳에서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사랑』에서 다룬 우스꽝스럽고 부조리한 사랑과 성의 이분법을 찾아볼 수 있다. 현대의 부조리한 삶 속에서 특히 전체주의라는 기괴한 체제를 배경으로 소설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사랑과 성의 분리와 분열은 좌절한 인간 존재의 근원이다.--- p.146
밀란 쿤데라는 이제 세계적인 작가로서, 작품에서 다양한 테마와 인물을 다룬다. 성경에 기반을 둔 모티프를 이용한다든가 에세이, 자서전, 신화 등 다양한 문학 장르를 접목하기도 한다. 화자와 등장인물, 그리고 작가 자신이 함께 등장하는 기법을 자주 사용하고, 기억과 망각의 테마를 잘 다룬다. 그는 이제 자기가 실험해왔던 소설의 형태를 새로이 정의하면서 일반적으로 독자들이 소설, 특히 그의 소설을 읽는 방법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 밀란 쿤데라는 독자들의 소설 읽기에서 역사적인 전환점을 만들었다. 1950~1960년대 일련의 프랑스 소설가들이 누보로망으로 소설사의 새 장을 열었듯이.--- p.273
이 소설의 주요 주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다시 겪을 수 없기 때문에 인생에서 정해진 답이란 결코 없다는 의미이다. 이런 생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속물이다. 독일어로 이 단어는 문화의 저속화 현상을 의미한다. 본래 싸구려, 저속한 예술품 등을 일컬었던 단어가 이 소설에서는,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혹은 본질이 아닌 본질을 가장한 모조의 세계 같은 위선적 모습을 표현하는 데 쓰인다. (…)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때때로 수필을 읽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또한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이야기들을 혼합시켜 독자로 하여금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그는 또 소설 안에서 훌륭한 사색가 역할을 한다.--- pp.358-359
밀란 쿤데라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텍스트로 이루어진 새로운 형태의 소설을 만든다. 그는 “소설 쓰기는 자전거 타기가 아니라 수많은 요리가 나오는 잔치 같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전통적인 소설의 양식인 원인과 결과, 인물의 발달, 플롯의 사슬 등을 피한다. 대신 문학적인 양식들, 역사와 철학 에세이로부터 어휘 사전, 인물 묘사와 신문 잡지의 표제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학적 양식들로 대체한다. 그래서 그는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작가로 평가받는다.
--- p.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