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도 그렇고 철학도 그렇고 모든 예술이라는 것은 그 생경한 느낌의 세계와 위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모든 비밀이 있습니다. 가구처럼 살아가는 커플들은 헛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녁이 되고 밤이 되면 우리는 습관처럼 집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설레는 맘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공연을 보러 가고, 영화를 보러 가고, 미술관, 박물관 등에 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설렘을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느낌, 그 위험에 빠지기 위해서지요. 모든 예술, 모든 인문학의 존재 이유는 바로 그 런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그런 것입니다. (21쪽, 강신주 ‘자본주의 세상에서 상처 받지 않을 권리’ 중에서)
‘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훨씬 근원적인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통 ‘나’라고 말할 때는 내가 의식하고 감성으로 느낄 수 있는 정도의 ‘나’라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몸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 그 경계를 뛰어넘게 됩니다. (…)
동양의학이든 물리학이든 현대 인류의 지성이 말하는 몸은 ‘나’라는 의식 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고 존재와 우주가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몸’을 말할 때 이미 나는 이 생명의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알아야 나와 내 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라고 하는 존재가 이 생명을 낳은 우주라는 시공간에서 어떻게 활동 하고 삶을 구성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변주되는 것입니다. (49~50쪽, 고미숙 ‘현대인을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 몸, 돈, 사랑’ 중에서)
먼저 우리가 제일 고민해야 할 인문학의 가장 기초적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입니다. 이것은 진실된 참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진·선·미의 인문학’ 중에서 진해당하는 ‘진리의 성찰’인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이웃과 더불어 사는 도덕적인 삶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과 성찰입니다. 이런 선.에 해당 하는 인문학의 기본 성찰을 위해서 우리는 합리적으로, 또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도덕적 판단은 이성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인문학의 과제는 ‘어떻게 죽느냐’ 즉 탁월함의 추구를 통해 얼마나 창조적인 삶을 살고, 그리고 얼마나 멋지게 죽느냐 하는 미대한 과제입니다. (92~93쪽, 김상근 ‘인간에 대한 학문, 인문학을 말하다’ 중에서)
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으로라도 아름답게 살겠다고 해서 그 바람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의 삶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대체로 구지레한 것입니다. 때로는 혐오감을 참기 어려울 만큼 흉하고 더러운 꼴을 보기도 하고 스스로 연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름다움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마구 살아버리기로 하면 그것은 인생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일입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 자체가 아름다움을 갈구하도록 되어 있어서 그렇게 살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추한 현실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삶 그 자체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137~138쪽, 이태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이 아름답다’ 중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포스트모던적인 태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여 기서 말하는 포스트모던적인 태도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더욱더 노력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사실상 한반도에서 겪은 이 역사적 고통은 완전히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어떻게든 치유되어야 하는 상처이자 트라우마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처는 우리를 자유롭게도 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국민들이 상처 받는 것이 두려워 항상 국민들을 보호만 하는 나라는 아니지 않나요 상처 받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히 고립되었다는 뜻일 테니까요. (172~173쪽, 슬라보예 지젝 ‘사유하라, 그리고 변화하라’ 중에서)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성에 제어되지 않고 욕망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고, 이념의 수행자가 아니라 욕망의 실행자가 된다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말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을 하려는 사람입니다. 삶의 궁극적인 동력은 결국 나를 표현함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침해하는 어떤 것에도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거칠어보일 수도 있겠으나 나의 주체성, 나의 존재성, 나의 존엄을 침해하는 것에는 거침없이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27쪽, 최진석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중에서)
사람이 죽기 전까지 버려서는 안 될 두 가지도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는 죽는 순간까지 절대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못 하고 이삿짐처럼 취급합니다. 내적 자발성에서 생산되는 기준에 의존하지 않고 항상 외부의 기준에 견주어서 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이 보잘 것 없고 나빠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보편적 이념과 같은 외부의 기준이라는 것은 술 찌꺼기에 불과합니다. 술 찌꺼기에 빗대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보편적 이념과 보편적 기준들은 이미 지나간 가공물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에서 벗어나 욕망의 담당자로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에 선 주체로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때의 자신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훨씬 자유로운 모습일 것 입니다. (228~229쪽, 최진석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중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물체’라는 것만으로도 이 우주의 기적이지만, 또한 각자의 정체성은 초미세 확률에 해당하는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어찌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많은 학생들과 혹은 젊은이들이 때론 성적이 안 나와서, 좋은 대학에 못 가서, 취업에 실패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서, 빚이 많아서 식음을 전폐하거나 죽음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내팽개쳐버리기엔 여러분은 너무도 고귀한 존재입니다. 어쩌면 붓다가 설파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바로 이 뜻이 아닐까요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