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책을 썼느냐고요?
여러분한테도 좋아하는 시 한 편쯤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서요. 좋아하는 음악 두어 가락 있으시죠. 근데 그 음악들 진심으로 좋아하시잖아요. 시도 때도 없이 듣고 흥얼거리고 있잖아요. 누군가 어떤 음악
좋아하느냐고 물어오면 신나서 말이 많아지고, 상대도 그 음악을 좋아하는 걸 알게 되면 그 사람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그럴 만한 좋은 시들도 꽤 많거든요. 때로는 음악보다 더 슬프고 음악보다 더 신나는 시들…….
요즘 인문학, 인문학, 많이들 말하잖아요. 전 그분들에게 좋아하는 시가 뭐냐고 묻고 싶어요. 인문학 하면 여러분은 뭐가 떠오르나요? 철학, 역사, 언어, 예술 등이 떠오를 수도 있겠고, 도서관이나 서점이
나 책들이 떠오를 수도 있겠고, 아니면 뭐 스티브 잡스가 떠오를 수도 있겠네요. 전 인문학 하면 제일 먼저 시가 떠올라요. 왜냐고요? 시가 언어의 꽃이고, 시가 예술의 척추잖아요. 그래서 시를 빼고 인문학을 말하는 건, 사람을 빼고 인문학을 말하는 것 같아 보여요. 좀 과한 얘기라고요? 예, 좀 그런 거 같기도 합니다만…….
--- p.4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처음 3줄은 느낌이 오죠? 맞습니다. 2연에서 단초가 제시되었던, ‘그’의 죽음을 부정하고 싶은 화자의 마음이 좀 더 강렬히 표현되고 있는 겁니다. ‘그’의 집에 도착한 화자는 늘 그랬듯 큰소리로 ‘그’를 부를 겁니다. ‘그’는 나오질 않습니다. 자식이, 왜 안 나오는 거지? 내 말을 못 들었나?
4∼5행은 좀 어떤가요? 여긴 생략 때문에 좀 생뚱맞은 느낌이 들수도 있겠습니다만……. 다음 두 문장을 합쳐볼까요.
문장 1 놈은 아직 살아 있는 상태다.
문장 2 그리고 놈은 나를 목련이 필 때만 초대했었다.
자, 이제 한번 ‘그’에게 따져 물어볼까요? “어서, 나와, 인마. 근데 너 목련도 안 폈는데 왜 날 불렀어. 이거 반칙 아냐?” 좀 더 살을 붙여볼까요. “어서 나와, 인마. 근데 너 목련도 안 폈는데 왜 날 불렀어. 이거 반칙 아냐? 자식,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몇 달 일찍 나를 부른 거야? 그래도 인마, 조금만 더 기다리지 그랬어. 이제 목련 피려면 몇 달 안 남았잖아. 아니, 그걸 못 기다리고 이 겨울날에 날 부른 거야? 에이, 이 성급한 놈 그 몇 달을 못 기다리고……. 그 몇 달을 못 기다리고…….”
물론 ‘나’도 반칙을 하나 범했었죠. 지난봄 ‘그’의 초대에 응하지 못했던 것. 하지만 ‘그’의 반칙이 더 뼈아프네요. 목련도 피지 않은 겨울에 ‘나’를 느닷없이 초대한 것. 혹시 화자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지난봄 내가 약속을 지켰다면 놈이 나를 이렇게 일찍 부르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 p.22
공중空中에 떠다니는
저기 저 새여
네 몸에는 털 있고 깃이 있지.
밭에는 밭곡식
논에는 물벼
눌하게 익어서 수그러졌네!
초산楚山 지나 적유령狄踰嶺
넘어선다
짐 실은 저 나귀는 너 왜 넘니?
먼저 제목부터 살피는 게 좋겠죠. 제목의 ‘서도西道’는 ‘황해도와 평안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인 그 ‘서도’고, ‘여운餘韻’은 ‘아직 가시지 않고 남아 있는 운치’를 의미하는 그 ‘여운’입니다. 여기선 그냥 공간적 배경만 챙기는 게 좋겠습니다. 화자의 위치는 서도西道의 어딘가입니다.
이제 부제로 가볼까요. ‘옷과 밥과 자유’……. 가만, 이렇게 해볼까요. 이 시는 무엇에 대한 시다? 맞아요. ‘옷과 밥과 자유’에 대한 시겠죠. 제목과 연결해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네요. 이 시는 ‘서도’에서 쓰인 ‘옷과 밥과 자유’에 대한 시다.
가만, 시가 총 세 개 연이잖아요. 이거 혹시 부제의 세 개 단어와 시의 세 개 연이 일대일로 대응하는 구조 아닐까요. 그러니까 1연이 ‘옷’ 얘기, 2연이 ‘밥’ 얘기, 3연이 ‘자유’ 얘기……. 에이, 꼭 그럴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요? 맞습니다. 꼭 그럴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잖아요. 그렇게 가정하고 읽어볼까요. 읽다가 문제가 생기면 가정을 폐기하더라도…….
--- p.52
땡볕이라는 말썽꾸러기 하나 연상하셨나요. 붉고 뜨거운 귀염둥이 땡볕이 푸른 감 속을 비집고 들어가서, 기어이 그 감을 붉게 물들입니다. 그러곤 그 감 속에서 겨울이 올 때까지 깊이 오래 평화로이 잠을 잡니다. 피곤했거든요, 샛푸른 감을 붉게 붉게 물들이느라. 어느 겨울 누군가가 감 속에서 곤히 잠든 땡볕을 흔들어 깨웁니다. 야, 야! 깜짝 놀라 깨어난 땡볕이 등잔불처럼 확, 빛을 내며 달아오릅니다. 그럴 수밖에요. 놈은 애초에 불덩이고 빛덩이였으니까요.
참 신묘한 상상력이죠. 어느 겨울 제상 아래 놓인 연시를 보며 등잔불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던 거겠죠. 그러곤 짐짓 확신을 합니다. 둘이 닮은 건 우연이 아니다. 절대 우연이 아니다. 그러곤 추적해 들어갑니다. 연시와 등잔불이 닮은 이유는 대체 뭘까? 연시가 등잔불처럼 빛날 수 있었던 이유는 과연 뭘까? 그러곤 범인 검거. 범인은 땡볕, 여름 한낮 푸른 감에 꽂힌 땡볕. 가만 이거 상상력이 과한 거 아닐까? 아니지. 푸른 감은 땡감, 그리고 거기에 꽂힌 땡볕. 양자가 무관할 수 있겠나. 범인 확정. 땡볕!
--- p.190
가녀린 머리, 주사 찍은 자리에, 입술을 붙이고
이 구절, 특이하다는 생각 안 해보셨나요. 대체 왜 이 구절은 두번의 쉼표로 세 조각이 나 있는 걸까요.
“가녀린 머리의 주사 찍은 자리에 입술을 붙이고”
라고 편하게 이어 적어도 될 텐데 말이죠.
화자가 숨이 찼던 게 아니었을까요. 아이와 세상과 함께 뜨겁게 발열하면서 자기 호흡도 따라서 가빠졌던 거겠죠. 슬픔-숨막힘과 발열-숨막힘 때문에 화자가 호흡 곤란으로 헐떡거립니다. 민물에 담긴
바닷고기처럼 헐떡거립니다. 그렇게 헐떡거리며 아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갑니다. 아이의 뜨거운 머리에 자신의 뜨거운 입술을 맞춥니다. 더더욱 숨이 잘 안 쉬어집니다. ‘가녀린 머리 (숨) 주사 찍은 자리에 (숨)입술을 붙이고…….’
참고로 정지용은 열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중 다섯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시의 아이가 「유리창」의 그 아이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긴 두 아이가 같은 존재냐 다른 존재냐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끔찍한 경험을 시인이 다섯 번이나 했다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사망률이 높은 시대였다고 해도 이거 참……. 정지용의 삶도 그다지 오래 지속되진 않았습니다. 34세의 젊은 나이에 7여 년 동안 그를 괴롭히던 지병인 신장병으로 숨을 거두게 되죠. 자식 다섯을 잃은 비운悲運의 아버지, 정지용. 어찌 보면 신이 정지용을 일찍 데려간 게 그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참, 사는 게 뭔지…….
--- p.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