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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하루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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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하루는 없다

: 아픈 몸과 성장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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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2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208쪽 | 254g | 128*195*13mm
ISBN13 9791190382526
ISBN10 1190382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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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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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를 위해 건강을 미뤄두었다. 당장 내 몸이 괴로워하며 보내는 신호를 모른 체하고 미래를 향해 달렸다. 몸은 나의 열망도, 로스쿨 입학시험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고 며칠 후, 나는 구급차에 실려 갔다. 그때 까만 천장을 바라보며 예감했다. 이제부터는 미뤄두었던 몸의 빚을 갚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 p.14

투석은 또 다른 삶의 방식이었다. 죽음으로 가는 길목이 아닌 나를 살리는 길에 가까웠다. 삶을 얻은 것에 비하면 당연했던 일상을 내어준 것은 아무것도 아닐지 몰랐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대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복막투석 환자다.
--- p.21

상세 불명의 전신 홍반성 루푸스, 이름조차 미스터리한 나의 병. 현대 의학이 이렇게나 발달했는데도 원인도, 근본적인 치료법도 없는 내 병은 제멋대로 나를 휘두른다. 의사 선생님은 우선 푹 쉬고 잘 먹으라며, 잘 자야 한다고 아주 기본적인 삶의 조건들을 되짚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런 것들뿐이었다. 10년 전에도,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 p.63

한 달의 고군분투는 고작 3분의 진료로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내 몸이 원하는 속도를 맞추지 못했다. 매번 내 속도계는 틀리고 있었다.
--- p.64

몸이 아픈 후로는 늘 달려가는 친구들의 뒷모습만 바라봐야 했다. 출발점이 다른 경주를 하는 게 아니라, 그 경주에서 이미 10년 전에 낙오되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경기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껏 같이 달려왔던 친구들이 나를 뒤로한 채 땀 흘리며 달리는 모습을 벤치에 앉아 바라만 보고 있다. 나도 때론 협업하고 때론 질투하며 함께 달리고 싶은데. 앞으로도 경기장 구석에서 혼자만의 경주를 하게 될 것이다.
--- p.83

아픔이 나를 자주 외롭게 해서, 언제나 이해와 공감을 바랐다. 그러면서도 아프다는 사실을 쉽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곧 루푸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과 잘하는 것, 제일 즐거운 순간 등 많은 반짝임으로 이루어진 나를 병의 이름으로 납작하게 정의하고 싶지는 않았다.
--- p.86

오랜 병원 생활에 약해진 몸은 모든 행동과 걸음걸이의 속도를 느리게 만들었다. 전에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성격이 급해 제일 앞서 걸었는데, 이제는 절뚝이며 걷느라 신호가 끝나기 전에야 겨우 건너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 도착할 때쯤 내 옆을 보면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있었다. 나는 여전히 나인데도 매 순간이 낯설고 때론 두려웠다.
--- p.114

이전까지는 살아 있음에 감사한 적 없었다.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은 당연하고 무엇을 얼마나 많이, 빠르게 성취하느냐가 중요했다. 성적과 성취로 내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자 부단히 애쓰며 살아왔다. 조금 더 빛나는 딸, 더 반짝이는 내가 되고 싶었다. 루푸스가 일상, 계획, 미래를 발목 잡을 때마다 억울하기만 했다. 그러나 완전히 바닥을 친 후로는 분명 루푸스를 만나게 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여전히 그 이유를 이해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 p.117

‘나는 나를 죽여왔는지도 몰라.’
눈에 확연히 보이는 시퍼런 멍은 꼭 내가 나를 때린 것만 같았다. 목표가 생기고 나면 지나치게 무리해서 나를 죽여가고 있었다. 마치 루푸스가 그러하듯이.
--- p.135

염색을 하지 못한 흰 머리, 불편한지 인상을 쓴 표정, 거칠어진 피부, 앙다문 입술. 곤히 잠든 그의 얼굴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낮에 잠깐 앉아만 있기에도 불편한, 딱딱하고 비좁은 보호자 침대 위에서 선희는 겨우 새우잠을 잤다. 어디에서나 곤히 잘 수 있다며 큰소리쳤지만 갈수록 그의 눈 밑은 어두워졌다.
--- p.169

가장 고요한 병동의 낮 시간, 창문으로 나른한 햇빛이 스몄다. 나는 또 여기에 누워 있구나. 익숙함과 지겨움에 고개를 젓다가 웃었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으면서도 한없이 살고 싶어지는 곳이, 바로 병원이었다.
--- p.177

종종 거울 앞에 서서 내 몸을 바라본다. 내 배에 그어진 세 개의 선을 또렷이 본다. 손톱만 한 것, 손가락만 한 것, 손 전체로도 가려지지 않는 것. 도관이 자리 잡았던 구멍, 그 호스를 넣기 위해 찢었던 자국, 웅이의 신장이 들어간 곳. 그리고 겨드랑이, 가슴, 골반, 허벅지 곳곳에 자리한 선홍빛의 튼 살 도 눈에 들어온다. 과거의 치열과 고통은 내 몸에 이렇게나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 p.193

새 삶을 잘 지켜내야 한다고, 천천히 몸을 돌보며 살자고 거듭 다짐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여서, 때로 조급함이 차오른다. 어서 뭐라도 되고 싶어서, 새로이 찾아낸 이 생의 기쁨으로 얼른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머릿속이 온갖 꿈과 계획으로 가득 찬다. 그럴 때면 시동 걸린 자동차처럼 마음속에 드릉드릉 소리가 울린다. 그때마다 내 마음에게 단호하게 항변한다. 나의 새 삶은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았다고. 더 무럭무럭 자라야 한다고.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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