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소설 세계’라는 것이 따로 있다. 소설은 이야기니까 그것은 ‘이야기 공간’이라고도 한다. 소설은 현실의 모방이라고 하지만 소설 세계가 곧 현실 세계는 아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우리의 현실 공간을 떠나 〈소낙비〉의 이야기 공간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방금 읽은 〈소낙비〉의 첫 단락은 ‘이야기 공간’의 첫 장면인 셈이다.
〈소낙비〉에서 ‘소설 세계’ 또는 ‘이야기 공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멀리 ‘하늘’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모여든다. 비가 올 것같다. 이 ‘비 한줄기’는 이 소설의 제목이 ‘소낙비’인 점과 함께, 결말에 가서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 때문에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을 ‘예시’한다는 점에서 중대하다. 작가는 이 사건을 미리 염두에 두고 썼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쯤에 소낙비를 예시해 둔 것이다. 눈여겨볼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햇발’은 아직 마을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짓궂은 햇발’과 소낙비를 연상케 하는 ‘검은 구름’의 교차는 〈소낙비〉의 계절을 의미한다. 〈소낙비〉의 계절은 여름 장마철이다.
--- p.14
-춘호네 집은 ‘겹겹 산속에 묻힌 외진 마을’이고, ‘듬성듬성 외딴 마을 가운데 안말’이고, ‘거칠어 가는 농촌’이라고 표현되는데, 그게 어떻게 생긴 건지, ‘외딴 마을 가운데 안말’이라면서, 외딴집은 뭐고, 외딴 마을은 뭐고, 또 안말은 무엇인지, 도대체 감이 안 잡힌다니까.
-그건 우리 모두가 평야 지대 다가구 마을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강원도 산골의 취락 구조를 잘 모르기 때문이야. 평야 지대에서 농토를 많이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함께 힘을 합하여 농사를 지어야 하니까 대규모 취락 구조를 이룬다. 거기 비하면 김유정의 마을은 강원도 산골이라 농토가 아주 적거든. 산비탈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겨우 자기 집 앞의 논뙈기, 밭뙈기를 갈아먹고 사는 정도야. 그러니 강원도 산골의 취락 구조 또한 산비탈에 의지하고 사는 띄엄띄엄 외딴집일 수밖에. 여기저기 띄엄띄엄 보이는 외딴집들이 모여서 그것들을 마을이라고 하는 거야. 산에서 내려온 춘호 처가 지금 그 외딴집과 외딴집 사이 ‘수양버들이 쭉 늘어박힌 논두렁길’을 가는 거야. 눈앞에는 ‘감사나운 구름송이가 하늘 신폭을 휘덮고, 산 밑까지 내려앉고, 다시 걷히고’, ‘먼 데서 개 짖는 소리’가 한적하다.
--- p.22~23
〈산골 나그네〉는 서울살이 이야기가 아니고 실레 마을 이야기라는 점을 나는 지금 말하는 중이다. 짧지만 2년 남짓한 고향 방문을 통해 들병이들의 삶을 발견하고, 서울로 돌아오자 곧 서울살이 이야기를 썼지만 발표도 할 수 없을 만큼 마음에 들지 않자 곧 다시 들병이 이야기를 썼고, 그것이 활자화되는 것을 계기로 그는 잇따라 네 편의 들병이 소설을 쓴 것이다.
김유정은 들병이 소설을 처음 잡지에 발표하고, 들병이 소설로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초기 주요 작품들도 들병이 소설이라고 할 만큼, 들병이들의 삶은 김유정 소설의 주요 테마가 되었다.
--- p.41~42
김유정의 작품 목록 가운데는 뜻밖에도 3편의 금광 소설이 들어 있다. 서울 이야기 아니면 춘천 실레 마을 이야기가 전부인 김유정에게 금광 소설이란 그 이유를 묻고 싶을 만큼 특별한 존재다. 강원도니까, 춘천이니까, 실레 마을 근처에 탄광이 있었나 보다 하고 지나치다가도, 그래도 어떻게 김유정이 탄광 소설을 쓰겠다고 덤빌 수 있었을까, 묻고 싶은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금 따는 콩밭〉 외에 〈노다지〉, 〈금〉까지 3편이나 된다. 금판에서 금광석을 훔치는 일이나 황금을 구하고자 허황된 투기의 꿈에 젖어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만무방’ 계의 인물들인 것이 사실이다. 김유정이 언제, 어떤 계기로 금광 체험을 쓰게 되었는지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다. 실레 마을로 내려가 사는 동안 마을에 누군가 광부로 일했던 사람이 있었거나, 그래서 그에게 광산 체험을 직접 들었거나, 그렇다고 김유정이 직접 광부가 되어 일했을 리는 없을 텐데, 그렇다면 김유정이 탄광 소설을 쓰기 위해 직접 현장을 답사했든지 간에, 김유정의 광산 소설에 대해서는 좀 더 조사해 볼 일이다.
--- p.75
김유정이 ‘먹고사는 수단과 방법’을 주목한 작가임은 앞서 밝힌 바 있다. 농촌에서, 산골에서, 그의 작중 인물들은 최저 삶을 바탕에 깔고, 여기서 더 내려가면 죽는다는 한계 상황을 살아간다.
김유정이 바라보는 삶의 현장은 어딜 가나 ‘난장판’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 집안이 망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버지와 형이 벌이는 광적인 난투극을 지켜보면서 형성된 시선이다. 아버지와 형의 칼부림은 집안에서 벌어지는 나의 일이지만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김유정이 바라보는 세상은 언제나 김유정의 세계이지만 언제나 김유정의 권한 밖이었다. 내가 끼어들기엔 너무나 벅차고도 어처구니없었다. 상관하기를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체념했지만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체념하면서도 바라보아야 하는 허탈함, 그것이 그와 그의 세상의 거리이다. 그 시선이 이번에는 금점으로 향한다.
--- p.89~90
〈봄봄〉은 착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착한 이야기다. 가난하고, 욕심 부리고, 욕심이 채워지지 않아 슬프고, 억울하고 한 것들은 모두가 착한 사람들을 착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들의 환경일 뿐 못난 그 자체는 아니다. 〈봄봄〉, 〈동백꽃〉 외에 김유정의 다른 작품들은 대부분 시골 농촌의 가난한 현실이다. 그러나 〈봄봄〉, 〈동백꽃〉은 먹고사는 일의 어두운 현실보다는 그 어두운 현실을 살아가는 착한 사람들의 착한 이야기이다. 김유정의 유머가 거기서 나왔다.
--- p.105
실제로 그는 시골로 내려가기 전 이미 작가가 되기를 꿈꾸고, 친구 안회남 등과 어울려 습작을 시작했었다. 그리고 다시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올 때는 단편 〈심청〉을 탈고하여 들고 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데, 그것도 시골 이야기이다. 김유정은 말하자면 그의 모든 작품을 서울에서 썼다. 시골 이야기를 써도 서울에서 썼고, 서울 이야기를 써도 서울에서 썼다. 더구나 김유정은 1935년 등단하면서부터 1937년 작고할 때까지 3년간에 걸쳐 그의 모든 작품을 집중적으로 발표하는데, 그래서 시기적으로는 시골 이야기와 서울 이야기를 가를 필요가 없다. 서울 이야기든 시골 이야기든 구분 없이 그의 소설은 같은 시기, 같은 서울에서 집중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 p.113
실제로 그는 시골로 내려가기 전 이미 작가가 되기를 꿈꾸고, 친구 안회남 등과 어울려 습작을 시작했었다. 그리고 다시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올 때는 단편 〈심청〉을 탈고하여 들고 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데, 그것도 시골 이야기이다. 김유정은 말하자면 그의 모든 작품을 서울에서 썼다. 시골 이야기를 써도 서울에서 썼고, 서울 이야기를 써도 서울에서 썼다. 더구나 김유정은 1935년 등단하면서부터 1937년 작고할 때까지 3년간에 걸쳐 그의 모든 작품을 집중적으로 발표하는데, 그래서 시기적으로는 시골 이야기와 서울 이야기를 가를 필요가 없다. 서울 이야기든 시골 이야기든 구분 없이 그의 소설은 같은 시기, 같은 서울에서 집중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 p.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