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는 한말에 득세한 개화파 집안으로서, 대구우체국장이었던 경운(慶運)의 4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이순득(李順得)과 혼인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조중학(成城中學) 4학년을 중퇴하고 상해로 건너가 후장대학(扈江大學)에서 수학한 뒤, 1919년 귀국하여 한말 주일공사관 참서관(參書官)을 지낸 당숙 보운(普運)에게 입양되었다. 1920년 《개벽(開闢)》에 <희생화(犧牲化)>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21년<빈처(貧妻)>를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같은해 조선일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홍사용(洪思容) · 이상화(李相和) · 나도향(羅稻香) · 박종화(朴鍾和) 등과 함께 《백조(白潮)》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였다. 1922년에는 동명사(東明社)에 입사,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사로 옮겼다. 1932년 상해에서 활약하던 공산주의자인 셋째 형인 정건(鼎建)의 체포와 죽음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는데, 그 자신도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말살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937년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으며, 빈궁 속에서도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지내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