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쟁에 나가 많은 사람을 죽였고, 남을 죽이기 위해 결투를 신청했고, 카드놀이로 큰돈을 잃었고, 농민들이 노동한 결실을 헛되이 먹어 없앴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처벌했고, 간음했고, 사람을 속였다. 기만, 절도, 온갖 음행, 폭음, 폭행, 살인…… 세상에 저지르지 않은 죄악이 없을 정도였는데도 나는 칭찬받았고, 내 동년배들은 나를 비교적 도덕적인 인간이라 여겼으며 지금도 그렇게 여긴다. 그렇게 십 년을 살았다.
--- p.15
아주 이상한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막막한 의혹의 순간이, 삶이 멈춰버린 듯한 순간이 찾아왔고, 그럴 때면 당혹감을 느끼며 근심에 잠겼다. 그러나 그런 상태는 금세 지나갔고, 나는 종전과 같은 생활을 이어갔다. 그후 그런 의혹의 순간이 점점 더 자주 똑같은 형태로 되풀이되기 시작했다.
--- p.26~27
내 삶은 멈춰버렸다. 숨쉬고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은 의미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숨쉬지 않고 먹지 않고 자지 않을 수 없었다. 합리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되는 희망이 없었기에 삶도 없었다. 뭔가 바라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이루든 못 이루든 결국 다 무의미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 p.30
그저 하루하루 살고 걷고 또 걸어 심연에 도달했는데 내 앞에 파멸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똑똑히 본 듯했다. 그 자리에서 멈출 수도 없었고, 되돌아갈 수도 없었고, 내 앞에 삶과 행복이라는 기만, 진짜 고통과 진짜 죽음, 즉 완전한 절멸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지 않겠다고 눈을 가릴 수도 없었다.
--- p.31
나는 오랫동안 성공을 거두고 세간의 찬사를 받았기에 예술이란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해왔다. 그러나 이것도 기만임을 곧 깨달았다. 예술은 삶의 장식, 삶의 미끼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삶에서 더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매료시킬 수 있겠는가?
--- p.36~37
‘나는 왜 살고, 왜 뭔가를 원하고, 왜 뭔가를 하는가?’
‘나의 삶은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죽음,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도 파괴하지 못하는 영원한 의미를 지니는가?’
--- p.41
지식은 삶의 질문에 적용되지 않을 때에만 명백하고 정확해졌다. 반면, 삶의 질문을 해결하려 하면 지식은 흐릿해지고 매력을 잃었다.
--- p.43
삶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때면 나는 숲에서 길을 잃은 사람의 심정이 되었다.
--- p.49
인간은 살아 있는 한 반드시 뭔가를 믿는다. 뭔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 p.81
무한한 신, 영혼의 신성, 서로 연결된 신과 인간의 일, 도덕적 선악 등의 관념들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인류의 삶이 거쳐온 머나먼 과거에 만들어진 관념들, 그것 없이는 삶 자체도 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그런 관념들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러한 인류 활동의 소산을 모두 버리고 나만의 관념들을 새로이 만들려 했던 것이다.
--- p.83~84
나는 기생충처럼 살았고, 스스로에게 무엇 때문에 사느냐고 묻고는 무엇 때문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삶의 의미가 생활을 꾸려가는 데 있다면, 삼십 년 동안 생활을 꾸려가기는커녕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의 생활까지 파괴해온 내가 삶은 악과 무의미의 연속이라는 답 외에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나의 삶은 악하고 무의미했다.
--- p.95
신에 대한 나의 탐구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작용이었는데,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감정이란 고립무원의 두려움, 낯선 것들에 둘러싸인 고독감, 나아가 그 뭔가에게 도움을 바라는 심정이었다.
--- p.99
아무도 나를 가엾게 여기지 않았고, 내 삶은 멈춘 것 같았다.
--- p.100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신을 알고자 하면 살아나고, 신을 잊고 신을 믿지 않으면 다시 죽어간다. 이 살아남과 죽음은 대체 무엇인가? 신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나는 살아 있지 않다. 신을 찾을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이라도 없었다면 나는 벌써 자살했을 것이다. 오직 신을 느끼고 찾을 때만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대체 나는 또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내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바로 그것. 신을 안다는 것과 산다는 것은 같다. 신은 곧 생명이다.
--- p.103
신을 찾으며 살아라, 그러면 신이 없는 삶도 사라질 것이다.
--- p.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