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라 그런지 오후가 되면서부터 슬슬 몰려들기 시작한 외지인들의 모습이 어느덧 열댓으로 늘어나 있었다. 고득학생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부도 한 쌍 끼여 있었다. 나는 해안선을 따라가며 실눈을 뜨고 숲언저리를 천천히 더듬었다. 대낮에 마신 술 때문인지 숲과 돌밭과의 경계가 마구 쭈글거렸다. 바람 한 줄기가 휘이 머리 끝을 채고 지나간 다음 한 때의 물새가 숲에서 날아올라 수평선 쪽으로 편대를 이뤄 날아가고 있었따.
여자는 숲의 끝머리,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언제 거기로 옮겨 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써레질이라도 하듯 파도 끝에서 돌밭이 헤쳐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담배 한 대 피울 도안 여자를 아득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돌밭 위에서 쟁쟁거리던 빛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바위턱에 올라서 있는 소리꾼의 목소리가 컬컬한 수리서의 진양조에서 중모리로 막 넘어가고 있었다. 여자가 내게로 고개를 비트는 것 같아 나는 푹 숨을 내쉬며 대각선 방향으로 그녀를 비껴 동백을 찾아볼 양으로 숲으로 들어갔다.
--- p.45-46
우리는 운동장에서 마주쳤다. 네가 천천히 다가왔다. 너를 보는게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든 건 왜일까. 네 얼굴을 비추는 노란 햇빛은 내가 가게 될 다른 좋은 세상에서 오는 것 같았다. 해를 등지고 있는 내 몸에서 뻗은 그림자는 짧고 짙었다.
'한번 안아 보자.'
'그래.'
나는 처음으로 너를 받아들였다. 네가 나를 안았던 팔을 풀고 외투 단추를 풀면서 말했다.
'너, 다시는 안 오겠구나.'
'그래.'
너는 외투를 벌렸다. 나느 마지막으로 네 품안에 스며들었다.
--- p.218
생각해 보니 나는 새벽에 함께 있던 여자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물론 어디서 온 여자인지 무얼 하는 여자인지도 모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인연이 되면 또 만나겠죠, 라며 사내가 먼저 등을 돌려 횟집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장님처럼 꺼이꺼이 길을 짚어 가며 홀로 그 곳을 돌아 나오고 있었다.
--- p.61
빈처 - 나는 그녀가 일기를 쓴다는 걸 몰랐다. 뭘 쓴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도무지 안 어울리는 일이었다. 자기 반성이나 자의식 같은 것이 일기를 쓰게 하는 나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학생 때 무슨 글을 써봤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내게 쓴 연애 편지 몇 장도 그저 그런 여자스러운 감상을 담고 있을 뿐 글재주 같은 건 없었다.
담배 피우는 여자 - 인류는 오래 전부터 담배를 피웠던 모양입니다. 로마시대의 묘지에서도 철이나 동으로 만들어진 파이프가 출토된다고 하더군요. 그 유해론이 의학적으로 규명되고 금연 빌딩이 선포되고, 금연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요즈음도 꾸준히 흡연 인구가 는다는 사실, 그건 무얼 뜻하는 걸까요?
--- p.223, ---p189
그날 새벽 왜 여자가 내 방으로 왔는지 물어 보지 않았다. 그 같은 일은 서로 묻고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성싶다. 여자도 그런 자신을 명백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여자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그런 식이었고 헤어질 때도 역시 그랬다.
--- p.5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