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방송이 전하는 뉴스를 들으며 나는 수없이 성호를 긋고 있었다. 주여 김 추기경에게 안식을 주소서. 추기경님. 우리를 기억하소서.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추기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게 깊이 새겨져 있는 그 모습, 그것은 오빠였다. 오빠아아 하는 여성 신자들의 부르짖음이었다.
1998년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 자리를 물러나던 날이었다. 명동성당을 메운 여성 신자들이 꽃과 깃발을 흔들며 그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흔들어대는 깃발과 깃발, 얼굴과 얼굴. 발을 구르는 여인도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추기경도 웃음 가득한 모습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때 여인들이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오빠. 오빠아.”
“오빠, 사랑해요.”
추기경님이 아니었다. 주교님도 신부님도 아니었다. 오빠였다. 그들은 노 사제에게 오빠라고 소리치고 손을 흔들면서, 떠나는 추기경을 보내고 있었다. --- 〈1장 가시는군요. 이제 이렇게 가시는군요〉 중에서
김 추기경이 내 삶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 것은 내가 천주교 신자가 되기 위해 성당으로 발길을 옮겨가기 그 전, 유신체제로 나라 전체가 얼어붙고 있을 때였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 해도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을 민주화의 상징으로 그의 몸짓 하나하나를 주시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야 했던 때였다. 내가 천주교 신자가 되는데도 김수환 추기경이라는 상징은 크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믿었다. 그 암울했던 시절에 한국 가톨릭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종교가 가져야 할 시대적 사명을, 소금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고. --- 〈4장 로사리오, 장미 꽃다발〉 중에서
“내가 요즈음 만난 사람이 없는데, 무슨 일이야 있겠어.”
고개를 저으면서 나는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그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귀빈실이라는 데서 기다렸다가 서울로 가는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넥타이는 몇 번이나 별일 아닐 겁니다라는 말을 했다.
이상스런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한 건 비행기에 오르고 나서였다. 전에 없이, 아내가 아이를 업고 있던 그 모습이 비장하게까지 느껴졌다. 그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밀어내기라도 하듯 나는 원고지를 꺼내놓고 그때 연재 중이던 중앙일보의 ‘욕망의 거리’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어쨌든 한 회분이라도 더 연재소설 원고를 써두자는 생각에서였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준비를 시작했을 때 나는 두 회분의 원고 열다섯 매를 써놓고 있었다. 이 와중에 원고가 써지는 내가 징그럽게까지 느껴졌다. --- 〈6장 기억의 늪〉 중에서
지옥에 다른 것은 없어도 담배는 있다는 말처럼, 담배도 된다는 말이 그렇게 낯설었다. 여기서 담배를 피워도 된다니. 담배를 물 정도로 입이 벌어지기나 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담배를 부탁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 때문에 온 사람들 있지요. 죄송합니다만, 그 사람들한테도 한 곽씩 부탁합니다.”
새파란 아이가 말했다.
“뭐 이런 새끼들이 다 있어.”
“네?”
“저 쪽 방에 있는 새끼도 같이 잡혀온 놈들한테 담배 한 곽씩 돌리라고 하던데. 이 새끼들 웃기는 놈들이네.”
아. 다들 알고 있구나. 끌려온 걸 서로들 알고 있구나. 어느 샌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찝찔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서 입꼬리에 와 멎었다. --- 〈6장 기억의 늪〉 중에서
그 무렵 나는 읽고 있었다. 어떤 강론에서 김 추기경이 하던 말이었다. 서로 사랑하라고. 서로 하나가 되라고.
추기경님.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쉽답니다. 사랑할 것을 사랑하는 건 더 쉽답니다.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도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것,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나요. 서로 사랑하라가 아닙니다. 당신은 그 사랑법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증오를 가르친 자를 어떻게 사랑하나요. 추기경님도 고문 한번 받아보시지요. 그러고 나서 어디 그 잘난 사랑법을 한번 알려주시지요.
그리고 말입니다. 용서는 서로 화해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나 잘 해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저들과 화해할 일이 없는데 제가 무슨 용서를 합니까.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사람과 무슨 화해를 하며 내가 왜 그들을 용서해야 합니까. 아니지요. 사랑과 용서도 놓여야 할 자리가 있는 거 아닌가요. 고통을 주었다는 의식조차 없는 사람한테 가서, 우리 화해하자 난 너를 사랑해 한다면 그가 오히려 물을 걸요. 뭘 화해하고, 네가 날 왜 사랑하냐고 말입니다. --- 〈7장 나는 없었다〉 중에서
천지는 비췻빛으로 깊고 푸르렀다. 햇살은 소리가 날듯이 투명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모래언덕에 제대가 마련되고 수녀들은 촛불을 켜고 세례성사를 준비?다.
그리고 나는…… 요한 크리소스토모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대부는 최서면 원장이었다. 내 이마에 기름이 발려지고, 물이 부어졌다. 성가가 이어지는 내내 나는 눈물 속에 있었다. 함께 한 모두가 눈물 속에 있었다. 여인들은 자신의 얼굴을 닦으랴 남편의 눈물을 닦으랴 노래가 끊겼고, 흐느끼기는 수녀님들도 마찬가지였다. ……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이제부터 어떻게 다르게 살아야 하나. 그때 누군가의 손이 내 어깨에 내려와 앉았다. 나는 미동도 할 수 없이 얼어붙어 있었다. 손의 무게도 온기도 느껴졌다. 말이, 한 줄기를 이루면서 가슴을 가로질러 갔다.
다 용서한다. 너는 이제 새 사람이다.
나는 숨이 멎어서 앉아 있었다.
어제까지의 지난날은 다 잊거라. 용서한다. 너는 새 사람이다.
아 하느님.
하느님은 나에게 손으로 오셨다. 그리고 말씀으로 오셨다. 용서한다고. 나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때리면 소리가 나는 종이 되어 있겠습니다. 당신 뜻으로. --- 〈10장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중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마다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더 가난하게 살지 못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것이라고 추기경님은 술회하셨습니다. “내 전부인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모습으로 오셔서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보여주시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추기경님의 삶은 언제나 저희들과 함께(with)하는 삶이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압니다. 그래서 더욱 추기경님이 그리운 것입니다.
……
추기경님이 저희들에게 남겨놓고 가신 뜻을 여기서 봅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기에, 우리 모두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건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씩 자기 생활 안에서 그 일상이 달라지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는 더 많이 버리고, 끊임없이 뉘우쳐야 합니다. 이웃을 위해서는 무엇 하나라도 서로 나눠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하면서 우리 모두가 추기경님이 남기고 가신 그 사랑에 가 닿아야 합니다.
간절히 바라오니, 우리들의 삶이 그렇게 가득하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추기경님, 오래 저희를 잊지 마소서.
--- 〈14장 김 추기경님, 오래 저희를 잊지 마소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