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의 짧은 역사
1988년 5월 28일 출범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이 스무 돌을 맞게 되었다. 이는 비단 한 단체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진보적 법률운동의 발자취이기도 하며, 계속해서 성장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도 있다. 민변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인권 변호 또는 민권 변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권변호사 1세대라고 해야 할 이병린 변호사에서 시작하여 이돈명(전 조선대 총장), 한승헌(전 감사원장), 조준희(전 언론중재위원회 위원장), 홍성우, 황인철 변호사 등이 1970년대 유신 시기 시국사건 변론을 주로 담당해 왔고, 80년대에는 조영래, 이상수, 박성민, 박원순(참여연대 창립) 등‘2세대’변호사들이 시국사건 변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망원동 수재사건과 구로동맹파업 사건 공동변론을 계기로 1986년 5월 19일「정의실현 법조인회(정법회)」를 결성하였는데, 이 모임에는 강신옥, 고영구(전 국정원장), 유현석, 이돈명, 이돈희(대법관 역임), 이해진, 조준희, 최영도, 하경철(헌법재판관), 한승헌, 홍성우, 황인철, 김동현, 김상철, 박성민, 박용일, 박원순, 서예교, 안영도, 유영혁, 이상수, 조영래, 하죽봉, 박연철, 박인제, 박찬주, 최병모, 김충진 변호사 등이 참여하여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를 통해 인권변론 활동을 확대하면서 김근태 고문사건, 부천서 성고문사건 등 5공 몰락을 초래한 주요사건을 변론하고 사회 쟁점화 하였다. 회원 중 이돈명 변호사(이부영 은닉), 이상수 변호사(대우조선 이석규 사망사건 참가-장례식 방해, 1987년 8월), 노무현 변호사(부산 가두집회-집시법 위반, 1987년 9월)가 구속되기도 하였다. 1987년 대선에서 5·18 광주학살의 주범이던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1988년부터 젊은 변호사들을 중심으로“자주·민주·통일을 목표로 하는 민족민주운동의 한 부문”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자 한「청년변호사회(청변)」가 결성되었다. 이 모임에는 이양원, 이석태, 조용환, 백승헌, 유남영, 김형태 변호사가 참여하였고, 기존 정법회의 멤버였던 박원순, 임재연, 이원영, 박인제 변호사와 박용석, 임희택, 손광운 변호사가 차례로 참가하였다. 이렇게 조금은 다른 길을 가고 있던‘정법회’와‘청변’은 몇 차례 논의와 고민을 거쳐 통합을 결정하고, 1988년 5월 28일 베어스 타운에서 51명의 회원으로 민변이 출범하게 되었고, 고 조영래 변호사의 제안으로 당시 단체 이름으로는 생소하였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라는 이름을 정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 사회 민주화를 위한 법조부문운동단체가 처음 생기게 된 것이고, 정법회와 청변의 통합으로 신구세대가 뜻을 같이 함으로써‘명망성’과‘활동성’이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변호사업무의 개별 분산적 성격으로부터 오는 단점을 극복하고 조직적이고 지속적 대응이 가능하게 되었다.
1988년 민변이 출범한 시기는 6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학살자들의 권위주의 통치가 국민들의 최소한의 자유와 기본권을 억압하고 있던 시기였고, 따라서 모임은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민중들을 보호하고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것을 절대적인 목표로 삼아야 했다. 출범하자마자 박종철, 권인숙 사건 등 시국사건 변론 요청이 폭주하였고, 임수경·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건 등 조력이 필요한 일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사노맹,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사건 등 계속되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변론하면서, 윤석양 보안사 민간인 사찰 양심선언, 1991년 시위·분신 정국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서는 변론 활동 외에 진실 발견을 위한 노력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동시에 양심수 석방, 개혁 입법 등 법을 도구로 악법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해야 했고, 비슷한 시기에 생긴 민가협, 인의협 등 사회운동 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현안에 대처하면서 제도 개혁 요구 등을 전개하였다.
김영삼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1992년 이후 사회 분위기가 변화되어 국민적 저항활동에 대한 변론 자체는 다소 줄었으나 형식적 민주주의 속에서도 여전히 악법과 공안기관에 의한 인권, 자유의 탄압이 계속되었다. 민변은 1993년 안기부의 간첩사건 조작 진상조사, 1994년『한국사회의 이해』저자들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 사건 등 형식적 민주주의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도, 변화된 사회 속에서 새로운 과제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하였다. 창립 4년을 맞아 어느 정도 안정적 기반을 형성했다는 판단으로 전문가적 인권단체로서의 중심을 견지하면서, 회원들의 다양한 활동을 수용하고 그 역량을 강화해야 했고, 특히 합법 공간이 확대되면서 연구 활동이나 다른 단체와의 연대를 통한 여론 형성, 대안 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각 분과를 통한 연구, 의견 발표 등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김영삼 정부가 후반을 향해 가던 1995년에는 형식적으로나마 진행되었던 개혁이 주춤하였을 뿐 아니라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정권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군부독재의 과거를 청산하는 움직임도 좌절되는 일이 생겼다. 민변은 이때야말로 진실을 밝히고 과거를 청산해야 할 유일한 기회라는 문제의식으로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함과 동시에 5·18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1996년 12월 26일 여당이 안기부법과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 시켰을 때에는 초유의 변호사 철야농성과 대국민 홍보책자『독재의 망령을 파헤치며』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1997년 12월,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헌정사상 첫 여야 정권교체가 실현된 후 형식적인 민주화가 진전됨에 따라 시국사건 변론이 민변 활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더욱 축소되었고, 우리사회가 개혁적, 진보적인 법률가들에게 요구하는 역할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 점점 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내적으로도 매년 30~40명의 신입회원 가입으로 300여 명에 달한 회원들의 관심영역이 다양해지고 반대로 변호사 업무환경의 변화와 함께 민변 외에도 다양한 시민단체가 급속히 성장하였다. 1999년 변협 선거에서 김창국 회원이 회장으로 당선되면서, 민변이 가지는 기본적인 한계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뜻을 같이 한 결론은 인권단체로서의 위상을 유지 강화하면서 그 역량을 최대한 결집할 수 있는 분야로서 공익소송활동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민변은 주요 상임위원회로 공익소송위원회를 설치하고, 초대 위원장을 이석태 회원으로 하여 김포공항 소음피해 소송, 흡연 피해자 집단소송, 수해 피해 주민들 집단소송 등 다양한 공익소송을 진행하였다.
시민사회의 성장은 2002년 총선에서‘총선 시민연대’의 결성과 혁혁한 활동 성과로 결실을 보게 되는데, 민변도 선거법 개정 연구나 헌법소원, 공천무효확인 소송 등 법률적 지원을 함으로써 이러한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스스로를‘시민사회’속의 전문가 단체로 자리매김하였고, 김대중 정부가 공언한 인권법 제정과 인권기구 설치가 올바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다른 시민단체들과 함께‘공동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인권법 공청회’개최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2001년부터는 인권주간 행사의 하나로 한국 인권보고대회를 개최하여 사회 각 분야의 인권상황을 아우름으로써‘인권’이 일시적인 싸움거리가 아니라 일상적 주류 담론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변 회원이기도 하였던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고 2004년 대통령 탄핵 사태로 개혁세력이 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석의 과반수를 점하는 결과가 나오자, 회원들 중 일부가 국회로 진출하고 공직에 임명되어 개혁 작업에 직접 참여하는 과정에서 민변은 이들의 활동을 견인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정치 중립적 시민단체로서 민변의 위상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졌고, 정치권에 진출한 일부 회원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살 우려도 생기면서 오히려 활동을 제약받기도 하였다.
한편 개혁세력의 국회 과반수 달성으로 과거 독재정권시절의 적폐를 청산하고 민주적 법제도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높아졌고,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법, 언론관계법 등 이른바 4대 개혁입법과 과거청산작업에 대해 전사회적으로 치열한 공방이 진행되었으며, 사법개혁위원회와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를 통해 형사소송법 개정, 국민 참여 재판제도 도입, 법학전문대학원 설립 등 각종 사법제도 개혁이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개혁입법, 과거청산, 사법개혁 등이 구체적으로 진행되면서 민변은 진보적 전문가단체로서 구체적 대안을 개발하고 분명한 목소리를 내는데 주력을 기울였다. 동시에 FTA 반대, 쇠고기 수입 졸속 협상과 비정규직법 제정에 반대하고 이랜드 비정규직에 대한 부당해고에 항의하는 등 민변의 목소리와 법률적 조력이 필요한 현안에 적극 대응하고,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에서 비롯된 삼성그룹의 비자금 불법로비 사건에 실질적으로 결합하였다.
2008년은 민변의 창립 20년을 맞는 시기이다. 1988년 출범한 모임이 지난 20년을 마무리하면서 그 성과와 미진한 부분들을 되돌아보고 평가함과 동시에 변화하는 사회를 정확히 분석해 내고 그것이 민변에 요구하는 바에 따라 단체의 위상과 활동 방향을 재정립해 나가야 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사회에 산적하고 민변이 기꺼이 져야 할 시대의 요청들이 있다. 창립 20주년을 맞는 민변은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영역에서 상시적으로 입법·사법작용을 모니터링 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판례, 관련 법제개정, 관련 정부기구 및 시민단체 모니터링)과 관련 시민단체, 정부기구 등과의 안정적인 연대 채널 가동 등을 활성화하기 위해 조직 내부적으로 각 위원회의 활동을 실무 간사와 함께 기획하고 회원들의 역량을 효과적으로 동원·배치하는 안정적 조율자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실질적인 상근 변호사 제도를 도입하기로 하였고, 보다 적극적인 공익소송 발굴과 지원을 통해 사회적 약자 보호와 법을 통한 제도 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관련 시스템을 정비하고 재원을 마련하는 등의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