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내러티브에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삶이다. 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삶의 형체와 기능으로서의 사랑이다. 삶과 사랑을 꼭 필요한 문맥 안에 두기 위해서, 메타내러티브는 우리에게 내가 누구인지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이 누구인지도 말해 준다. ‘타인’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잘 살게 해 주는 것이다. 수많은 진영에서 인기를 잃은 큰 내러티브는 나 자신, 사랑의 의미, 주변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에게 보여 줄 것이 많이 있다. 그것은 다른 어떤 사랑 이야기와도 다른 “나는 너를 사랑한다”의 이야기다.
이제는 우리가 큰 이야기, 삶 전체의 기초가 되는 이야기를 버리면서 잃어버린 것들을 재검토해야 할 때다.
- 37쪽에서
경우에 따라 그것은 잘못된 생활양식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죽음의 양식의 문제다. 날마다 우리는 삶이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택한다. 일상생활이 풍요롭고 보람되다 해도 때로는 정말 일상 ‘생활’이 아니다. 일상 죽음이다. 우리는 이 행성에서 한 번도 제대로 살아 보지 못한 채 허겁지겁 살아간다. 공룡들이 살던 것처럼만 사는 것이다. 공룡 인생관은 매일의 실존에 대한 두뇌의 기본적 반응이다. 이것을 먹고, 저것 때문에 싸우고, 자신을 보호하고, 최대한 자주 쾌락을 즐기라. 4대 생활 법칙―먹기, 싸우기, 도망가기, 섹스―대로 사는 공룡들처럼, 우리는 손닿는 것마다 다 유린하고 망치면서 온 사방에 죽음과 파멸을 부른다.
- 43-44쪽에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 세 단어 속에 임재의 정수가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 세 단어 속에 성경적 생활양식의 정수가 있다.… 다른 모든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그 존재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님 임재의 세 단어를 말하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 세 어절이 영어에서 가장 바로 알기 어려운 세 단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는 ‘나’가 신이 되어버린 곳, ‘사랑’이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과는 거리가 먼 곳, 그리고 사람들이 ‘너’라는 단어에(그나마 간신히 그 단어를 말할 수라도 있다면) 질식하는 곳이다.
- 71쪽에서
우리는 아이가 부모와 누리는 친밀함을 원하면서도, 성인이 누리는 자유와 자율성을 그대로 원한다. 우리는 언약의 부대낌 속에 뒤틀리고 묶여서 갇히기를 원치 않으면서도, 만족스럽고 지속적인 관계를 죽도록 찾아다닌다. 그 관계에 무엇이 포함되는지 아는가? “나는 너를 사랑한다”의 부대낌, 상호 언약의 근본적 메타내러티브다.
- 143쪽에서
이 세 단어에서 우리의 최대 문제는 문법의 문제다. ‘나’는 주어, ‘너’는 목적어, ‘사랑하다’는 동사다. ‘너’를 주어(주체)가 아니라 목적어(객체)로 대할 때마다 우리는 복음을 타협하는 것이다. 현실을 우리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 자신과 분리된 것으로 볼 때마다 우리는 복음을 타협하는 것이다. 복음은 주체만 알고 객체는 모른다. ‘나는-너를-사랑한다’보다는 ‘나-너는 사랑한다’로 사는 것이 더 좋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맡겨 주신 책임을, 우리는 ‘나-너는 사랑한다’로 받아들인다. 내가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이기에, 오직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만, 나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이라는 ‘너,’ 다른 사람들이라는 ‘너,’ 하나님의 피조세계라는 ‘너’를 사랑할 수 있다. 성경의 표현으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는 이 진리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세 단어를 바로 아는 법을, 우리 스스로 알아내도록 버려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먼저 우리를 사랑하기로 하셨다. 가장 어려운 세 단어를 실천하는 엄청난 도전 앞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스승이고 교사이시다.
- 159쪽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