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속도가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 되었을까? 우리는 모두 이 지상에 머무는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채워 넣으려 애쓴다. 물론 대부분 실패할 수밖에 없는 헛된 노력이다. 많은 이가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인터넷과 SNS 등을 통해 타인과 상시 연결된 상태로 살아가지만, 행복은커녕 우울증과 번아웃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이건 오히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는 현대의 가속화 문화 때문에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 문화에서 속도를 늦추는 사람, 천천히 가거나, 혹은 가던 길을 아예 멈춰버린 사람은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도태되거나 어리석은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회 속에서 그의 자리가 배제되어, 결국 우울증 진단을 받을지도 모른다.
---「프롤로그」중에서
현대인을 괴롭히는 불안을 근본적으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정신적 백신이 필요하다. 나의 처방전은 철학이다. 특히 가속화 문화에서 불안 없이 생존하는 법, 단단히 서 있는 법을 배우기 위해선 스토아 철학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이 고대 철학이 강조하는 자기통제, 마음의 평화를 얻는 법, 존엄과 의무, 삶의 유한한 본성에 대한 성찰 같은 가르침은 우리에게 평안과 지혜를 준다. 스토아 철학의 덕목들은 끝없는 변화와 발전을 얄팍하게 강조하기보다는 우리가 일상적 삶에서 더 깊은 충만감을 느끼도록 한다.
---「프롤로그」중에서
인생에서 마주하는 문제의 답을 개개인의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는 강박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원인이다. 불안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려면, 우선 우리 안에 답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자기 탐색이나 자아 찾기가 유용한 점도 있지만, 거기에만 몰두할 필요는 전혀 없다. (…) 우리는 안이 아니라 밖을 쳐다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사회, 문화, 자연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인생을 잘 사는 법에 대한 답은 내 안에 있지 않다. ‘진정한 자아’ 같은 건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진정한 나’를 찾고 싶으면, 내면이 아니라 밖을 주시하고 귀 기울여야 한다. 내가 바라보는 것, 행동하는 일, 내 주변 사람들을 돌아봐야 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안이 아니라 밖에 있다.
---「1장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라」중에서
노예 출신으로 훗날 철인 황제가 존경하는 위대한 철학자가 된 에픽테토스 역시 매우 구체적인 조언을 남겼다. 매일 밤, 잠자리 키스를 할 때마다 사랑하는 아이의 죽음을 생각하라고 말한 것이다. 다소 지나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내일 아침 우리 아이가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라.인간의 유한한 운명을 생각하면, 가족의 유대는 더욱 깊어지고 아이들의 실수도 더 잘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에게 뭔가를 강요하는 대신, 그 존재만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잠들지 않고 칭얼대는 아기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는 부모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유한한 운명을 떠올린다면 그 고됨도 아이가 지금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으로 변할지 모른다. 에픽테토스라면 아마 생명을 잃은 아기보다는 매일 자지러지게 우는 아기를 안고 있는 게 낫다고 표현할 것이다. 부정적 시각화를 잘 사용하면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도, 그것을 행복으로 전환할 수 있다.
---「2장 삶은 흠투성이라는 걸 받아들여라」중에서
답을 알 수 없고, 때로는 문제가 뭔지도 알 수 없는 사회에서 ‘의심’은 우리가 딛고 설 만한 토대다. 우리는 의심을 딛고서도 단단히 서 있을 수 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를 강조하면서, 의심하는 태도야말로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단단한 뿌리가 되는 자세로 여겼다.
또한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이런 의심하는 삶의 방식을 실존적 이상으로 제안했다.그는 이것을 일종의 실존적 아이러니로 설명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세계관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많은 세계관 가운데 하나일 뿐임을 인정하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다른 세계관을 찾아 돌아다니라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세계관을 토대로 단단히 서되, 다른 사람들은 다른 세계관을 가질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런 태도를 ‘관용’이라 부른다.
---「3장 때로는 과감히 ‘아니요’라고 말하라」중에서
화를 내며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마음의 평화를 흐트러뜨리고, 단단히 서 있지 못하게 뒤흔드는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단단히 서 있고 싶다면 쉽게 넘어져서는 안 된다. 텔레비전과 광고, 소셜미디어에는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이런 호소 때문에 우리의 욕망은 쉴 새 없이 달라진다. 덧없는 욕망만 줄곧 좇는다면 결코 단단히 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정을 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진정성’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진정성’ 있게 감정을 마구 배출하는 사람이 되느니,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훨씬 존엄하게 살 수 있다. 다소 강하게 표현하면, 차라리 가면을 쓰는 연습을 하라. 다른 사람의 사소한 행동에 휘둘리지 않도록 연습하라.
---「4장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말라」중에서
“우리는 자신의 일처럼 친구의 기쁨을 기뻐하고, 그들의 슬픔에도 똑같이 슬퍼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하듯이 친구에게도 느낄 것이며, 친구를 위해서 어떤 수고든 기꺼이 마주할 것입니다.”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았던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는 우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심지어 친구를 위해 나의 손해도 무릅쓸 수 있는 것이 바로 우정이다.
반면, ‘삶의 코칭화’와 같은 인간관계의 도구화는 얼마나 불편한가? 만약 서로가 ‘쓸모’가 있을 때에만 유지되는 관계라면, 그 ‘쓸모’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전전긍긍할 것인가? 바로 그런 점에서 우정은, 역설적으로 전혀 쓸모가 없어야 한다. 쓸모가 없기에 더없이 쓸모 있는, 그 자체로 우리 삶에 큰 의미가 되는 중요한 것이다.
---「5장 멘토를 좇는 대신 우정을 쌓아라」중에서
그러나 더 깊은 의미에서 보자면 나는 그들의 소설이 우리 삶을 ‘진정’으로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유일한 진리’나 ‘인생의 정답’을 제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실제 삶의 여러 모습을 진실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책을 읽으면 우리에게 환상을 심어주지 않는, 황량하고 부정적인 문학이 꼭 우리를 우울하거나 비관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이런 책들은 자아 밖에 있는 모든 것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므로,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6장 소설을 읽어라」중에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바쁜 사람들은 현재 순간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데 현재 순간은 너무 짧기 때문에 잡을 수 없으며, 심지어 그 짧은 순간마저도 슬쩍 달아나버린다. 결국 그들은 여느 때처럼 많은 일들을 처리하는 데 정신을 판다.” 지나치게 바쁜 사람은 과거를 응시하지 않는다. 동시에 이 일 저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결국 어떤 순간에도 단단히 서 있지 못한다. 세네카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침착하고 잔잔한 마음은 삶의 구석구석을 산책할 힘이 있다. 그러나 너무 바쁜 마음은 무거운 멍에를 지기라도 한 듯 몸을 돌려 뒤돌아보지 못한다. 결국 그들의 삶은 어두운 나락으로 사라져 버린다.”
---「7장 당신이 뿌리내릴 곳을 찾아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