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영화 볼 건데 말이야. 왜 너도 알지? 긴 갈색 머리 여자가 나오는 그 영화.”
“무슨 영화인데?”
“알잖아. 그 녀석이 나오는 영화……. 그 영화 몰라?”
“가수하고 결혼한 녀석?”
“아니 딴 녀석.”
“아, 그 영화. 무슨 영화인지 알겠어. 그 키 작고 웃기는 녀석이 나오는 영화 말이구나.”
“맞아, 맞아!”
“별로라던데.”
“누가?”
“어떤 신문에서 누가 그랬는데. 누군지 기억이 안 나네. TV에도 나오는 사람인데.”
“아, 누군지 알겠다. 놀라운데. 라디오에 나오는 어떤 여자는 이 영화가 좋다고 그랬단 말이야.”
정말이지, 이 대화가 얼마나 절절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버스 안의 여인들과 똑같은 증상을 그대로 겪었다. 아니, 내가 바로 그 버스 안의 여인이다. --- p.17, 「안녕하세요? 그런데, 누구시더라…」 중에서
심리학자들은 깊이 저장된 기억(deep-storage memory) 에 대해 거론한다. 깊은 기억, 이른바 깊숙한 곳에서 동결된 기억이라 할지라도 갑자기 표면으로 올라와 해동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들, 그토록 끈질기게 지속되는 기억들이란 알고 보면 잊어먹는 게 속 편한 기억들일 때가 많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기억들은 노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종류의 기억들인 것이다. 신문 배달하는 아이의 이름을 잊을 수는 있어도, 안경을 어디에 두었는지는 생각 안 나도, 아침에 하기로 한 일은 기억 못해도, 간밤에 누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다 잊어먹었어도, 초등학교 1학년 때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나서 느낀 그 치욕감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바로 지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다. 시간은 이런 기억들을 제거하는 데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 --- p.109,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는 그 순간」 중에서
영화에는 자주 등장하지만 진짜 기억상실증은 드물다. 영화에 나오는 진짜 기억상실증이란 것들은 대개가 진짜 헛소리다. 영화에서 본 것을 기억상실증의 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화려할지는 모르지만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그건 아닙니다.” 할리우드 영화의 전형적인 이야기. 누군가가 머리를 강타당한 뒤에 기억을 상실했다가, 다시 한번 머리를 세게 부딪치고는 기억을 완전히 회복하는 내용에 대해 고든 박사는 강하게 부정한다. “두 번째 타격이 상황을 호전시킬 수 없어요. 아무 변화가 없거나 더 악화될 뿐이죠.”) --- p.140,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메뉴」 중에서
이나 케이로(역사가) : 9?11 다음 날, 밥과 나는 사건 현장을 차로 한 바퀴 돌았죠. 우리가 한 공터에 멈춰 섰어요. 우리는 한 공터에 멈춰 섰어요. 나는 세 개의 강철 빔이 서로 엇갈린 채 휘어져서 마치 세 개의 십자가처럼 보였던 것을 결코 잊지 못할 거에요. 경찰관들과 노동자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모습도요.
왜 섬광기억은 이토록 생생하게 회화적으로 지속되는가?
간단명료하게 말하면, 일정 부분 그것이 지니고 있는 정서적 힘 때문에 그렇다. 마치 아주 급박한 개인적 사건이 일어났을 때처럼 뇌에서 감정을 중재하는 아미그달라가 최대한 힘을 다해 깊게 기억을 새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즉 섬광 사건이 그토록 잘 기억나는 것은, 우리가 그 기억을 끊임없이 되새기기 때문이라는 점.
--- p.277, 「9·11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