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범종은 통일 신라 범종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8세기의 이른 시기부터 중국이나 일본 종과 다른 매우 독특한 형태와 의장(意匠)을 지니게 된다. 특히 여운이 긴 울림소리[共鳴]가 웅장하여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종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으로 꼽힌다. 우리나라 범종의 웅장한 소리와 긴 여운은 종의 형태에 기인한 것이다. 우선 종신의 외형은 마치 독(甕)을 거꾸로 엎어 놓은 것같이 위가 좁고 배 부분[鐘腹]이 불룩하다가 다시 종구 쪽으로 가면서 점차 오므라든 모습이다. 종을 치면 종 안에서 공명(共鳴)을 통한 맥놀이 현상이 일어나 소리가 울리게 되는데, 이 공명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종 아랫부분을 오므라들게 설계하여 소리를 잡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범종은 종각(鐘閣) 등에 높게 올려놓지 않고 지상에서 낮게 띄워 놓는 것이 일반적이며, 전통적으로 종구 아래쪽에 지면을 움푹 파거나 큰 독을 묻은 경우(움통)를 볼 수 있다. 이 역시 종구 쪽에서 빠져나온 공명이 움통 안에서 메아리 현상을 이루고 다시 종신 안으로 반사되어 그 여운이 길어지는 효과를 얻게 한다. ---「 제1부. “한국 범종의 구조와 특징”」중에서
범종의 제작 과정은 우선 녹인 금속을 형틀에 주입하여 만드는 주조법으로 이루어진다. 고대의 주종(鑄鐘) 기술은 전해지지 않지만, 우리나라 종의 아름다운 문양과 소리로 미루어 보아 어떤 금속기 못지않은 훌륭한 제작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종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으로는 비록 중국의 것이지만 『천공개물(天工開物)』(1637년)이라는 책에서 송나라 범종의 제작 기술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의 중편(中篇) 제8 야주(冶鑄)조에 당시 범종의 주조에 관한 그림과 설명이 구체적으로 도해되어 있는데, “종을 주조할 때 상등은 청동으로 만들고 하등은 주철로 사용한다(凡鑄鍾高者銅質, 下者鐵質)”고 기록되어 청동 종을 상급으로 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아쉽게도 비교적 늦은 시기의 기록 외에 범종의 주조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내용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 제1부. “한국 범종의 주조”」중에서
고려 시대 범종은 수량 면에서 전대에 비해 크게 늘어났으나, 전반적으로 통일 신라 범종에 비해 주조 기술이 거칠어지고 문양이 도식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결국 대량 생산에 따른 기술적 역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데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겠다. 고려 시대 범종은 크게 입상연판문대의 유무를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고 이는 다시 초, 중, 후, 말기의 4기로 세분화하여 구분할 수 있다. 각 시기별로 특징적인 양식적 변화와 기간을 편년이 확실한 범종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우선 초기는 고려 범종이 성립되어 전개를 이루어 나간 통일 신라 범종과의 과도기적 시기로서 대체로 10세기 중엽부터 11세기 전반에 해당한다. 중기는 고려 범종으로의 완전한 정착을 이룬 1058년의 청녕4년명 종(淸寧四年銘鐘)이 만들어진 11세기 중엽부터 12세기 말경이다. 입상연판문대로 특징지어지는 고려 후기의 범종은 13세기 초부터 14세기 초 입상연판문대가 정착되고 소종이 유행한 시기에 해당하며, 마지막으로 14세기 전반부터 말까지 고려 말기의 범종은 외래 양식의 유입과 절충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제1부. “한국 범종의 시대별 변천” 」중에서
일본에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60여 점에 달하는 우리나라 범종이 남아 있었지만 폭격에 의한 소실과 화재 등으로 인하여 10점이 사라졌고 현재 소재가 파악된 우리나라 범종의 수량은 총 48점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된다. (중략) 일본 소재의 한국 범종은 규슈 다음으로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지역이 많으며 도쿄(東京) 쪽인 간토 지역으로 가면서 점차 그 수효가 줄어드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통일 신라와 고려 초기 범종의 경우 오이타현(大分縣), 시마네현(島根縣), 돗토리현(島取縣), 후쿠이현(福井縣) 등 주로 북부 해안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기타의 범종도 대부분 해안에서 가까운 지역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동시에 크기에 있어서도 스미요시진자의 종을 제외하고 높이 70~80센티미터 내외의 중형 범종이 많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종을 가져갈 때 이동이 간편한 중형 이하의 범종을 대상으로 삼아 해상 운반이 용이한 해안가 일대의 사찰, 신사(神社) 등에 옮겨 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 제1부. “일본에 있는 한국 범종” 」중에서
한국의 범종은 그 소리가 웅장하면서 긴 여운을 특징으로 한다. 마치 맥박이 뛰는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러한 범종의 긴 공명을 우리는 맥놀이 현상이라고도 부른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은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긴 여음(餘音)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맑고 웅장한 소리를 지니고 있어 누구라도 이 종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세속의 번뇌와 망상을 잊게 해 주는 그야말로 오묘한 천상의 소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덕대왕신종이 지니는 공명대가 사람이 듣기 가장 편한 음역대(주파수)에서 소리를 내기 때문이라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소리와 형태의 아름다움에서 단연 우리나라 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은 꽤 오랫동안이나 그 어엿한 본명을 놔두고 에밀레 종이라는 별칭으로 불려 왔다. 그런데 이 종에는 종의 몸체에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鍾之銘)”이란 명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원래는 경주 북천(北川) 쪽에 위치했던 봉덕사(奉德寺)란 절에 걸려 있던 종임을 알 수 있다. 상원사 종보다 약 반세기 뒤인 771년에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은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큰 크기인 동시에 현재까지 유일하게 손상 없이 그 형태를 유지해 온, 아직까지 타종이 가능한 통일 신라 범종이기도 하다.
---「 제2부. “성덕대왕신종” 」중에서
어린아이를 넣어 종을 완성함으로써 종소리가 어미를 부르는 것 같다는 다소 애절하기까지 한 설화의 내면은 성덕대왕신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실패와 어려움이 따랐는가를 은유적으로 대변해 준다. 그러나 실제로 범종을 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지옥에 빠져 고통받는 중생까지 제도하는 자비심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범종을 완성하고자 살아 있는 어린아이를 공양하였다는 내용 자체가 조성 목적에 전혀 맞지 않아 의구심이 든다. 더욱이 성덕대왕신종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상원사 종과 유사한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었으며 미량의 납과 아연 그리고 아주 극소수의 황, 철, 니켈 등이 함유되어 있었다. 결국 세간에 떠도는 바와 같은 인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인체의 성분이 70퍼센트 이상 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주조 당시에 사람을 공양하여 쇳물에 넣으면 처음부터 종이 깨져 완성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과학적으로도 에밀레 종의 유아희생(乳兒犧牲) 설화는 전혀 근거가 없는 전설에 불과할 뿐이다.
---「 제2부. “성덕대왕신종”
9세기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통일 신라 범종이 바로 804년에 만들어진 선림원지 출토 정원20년명 종(禪林院址 出土 貞元二十年銘鐘)이다. 범종에 기록된 명문은 당시의 관직명과 이두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인 동시에, 9세기 초의 편년 자료로서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 원래 종의 용뉴에 달았던 당시의 철제 고리가 함께 발견되어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해 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범종은 1948년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서면(西面) 미천리(米川里) 소재의 선림원지에서 발견된 이후 불과 3년 만에 한국전쟁으로 인해 소실되고 말았다. 더 명확히 말하자면, 처음 이 종을 발견한 장소가 설악산의 폐사지(廢寺址)였기 때문에 종의 안전한 보호를 위하여 오대산의 대찰 월정사(月精寺) 종각에 이 범종을 보관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이 퇴각하던 1951년 1·4 후퇴 무렵(1월 3일 또는 4일 전후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월정사에도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월정사가 북한군의 은신처가 되는 것을 막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절을 불태웠고 이때 선림원지 출토 정원 20년명 종도 불에 녹아 버리고 말았다. 전쟁의 폭격도 아닌 국군에 의해 자행된 이러한 만행은 두고두고 문화재 파괴의 뼈아픈 교훈으로 전해지고 있다.
---「 제2부. “선림원지 출토 정원20년명 종”」중에서
통일 신라 후기 범종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2구 1조의 주악상이 이제 단독의 독립 주악상으로 바뀌어 횡적과 요고를 각기 나누어 연주한다는 점이다. 그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선림원지 출토 정원 20년명 종과 실상사 파종이 만들어졌던 9세기 전반에서 그다지 오래 지나지 않은 833년에 연지사명 조구진자 종이 만들어졌기에 비교적 짧은 기간 사이에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통일 신라 종의 최전성기 작품인 상원사 종이 만들어진 지 거의 100년이 지난 시점에 제작된 연지사명 조구진자 종을 기점으로 중요한 양식적 변화를 맞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형을 보게 되면 전형적인 통일 신라 범종의 양식을 갖추고 있으나 세부 의장이나 문양 면에서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 제2부. “연지사명 조구진자 종”」중에서
범종을 치는 장면이 묘사된 것으로 유명한 고대의 작품이 일본 나라(奈良)의 주구지(中宮寺)에 소장된 ‘천수국만다라수장’ 수본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 절에서 사용된 범종의 타종 장면을 묘사한 마애 조각이 우리 근처에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바로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石水洞) 산 32번지 바위 면에 새겨진 마애 범종이 그것이다. 이 마애상은 가로 535센티미터, 세로 505센티미터 정도의 커다란 암면을 고르게 다듬은 뒤 음각과 양각을 이용하여 부조 형태로 조각하였는데, 벽면 중앙에는 커다란 범종을 중심으로 이 범종을 매달기 위해 세워져 있는 2개의 기둥과 이를 가로지르는 종가(鐘架)로 구성되었다. 아래쪽에는 이 2개의 기둥을 받치고 있는 긴 바닥 면이 묘사되어 있고 그 위에 인물상이 서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중앙에 걸려 있는 범종의 양쪽에 길게 솟은 두 기둥 중에서 왼쪽 기둥 중단 아래에 승려 입상이 두 손으로 당목(撞木)을 잡고 종을 치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벽면에 조각한 마애종이란 중요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범종을 타종하는 승려 입상을 함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두어야 한다.
---「 제2부. “석수동 마애타종상”」중에서
북한의 평양시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된 대자사명 종은 해방 이후 어느 시기쯤 북한 현지에서 출토되어 알려지게 된 고려 시대 범종이다. 어느 한 곳 손상된 부분이 없이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지만 발견 이후 녹을 방지하기 위해 표면에 코팅을 한 듯 전면이 유리질처럼 반짝거리게 처리하여 원래의 색감을 잃고 있다. 그러나 이 종의 중요성은 12세기에 제작된 범종으로서는 현 높이가 83센티미터에 이르는 비교적 대형에 속하는 작품인 동시에 제작자와 절 이름, 중량까지 자세히 기록된 편년 작품이란 점에 있다. 특히 그동안 고려 후기 범종의 편년을 가늠하는 양식적 특징 가운데 하나인 상대 위에 솟아오르게 표현된 입상연판문대라는 별도의 장식이 처음으로 등장한 첫 번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중략) 더 정확히 구분하자면 12세기 말에 제작된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덕흥사명 종(1196년)에까지 아직 입상연판문대가 나타나지 않고 천판 위로 연판문대가 돌아가고 있으나 규슈국립박물관 소장의 천정사명 종(天井寺銘鐘, 1201년)에서 입상연판문대가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그 시작을 12세기 말로 편년하여 왔다. 그러던 중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북녘의 문화유산》 특별전에 출품된 평양시 조선중앙역사박물관 소장의 이 대자사명 종에 이미 입상연판문대가 완전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음이 확인되어 고려 후기 범종의 중요한 편년 기준인 입상연판문대가 이미 1192년에는 정착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 제2부. “대자사명 종”」중에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을 풍미했던 대표적인 승려 장인 사인비구(思印比丘)는 그가 제작한 범종의 특징을 통해 그 계열을 삼막사 종(三幕寺鐘, 1625년)을 제작했던 죽창(竹?), 정우(淨祐), 신원(信元), 원응비구(元應比丘)에서 찾을 수 있다. (중략) 사인비구가 제작한 범종의 전체적인 외형은 천판이 반원형으로 불룩하게 솟아 있고 종구 쪽으로 가면서 넓게 퍼져 종신이 마치 포탄을 반으로 자른 것 같은 모습이다. 용뉴는 목을 구부린 험상궂은 용두와 목 뒤로 꼬리가 휘감긴 음통이 부착되고, 상대 아래에 바로 붙여 연곽을 배치하며 종구 쪽에 하대를 두어 장식하는 등의 외형적 특징을 통해 전형
적인 한국 전통형 범종을 따른 것을 볼 수 있다.
---「 제2부. “사인비구의 범종”」중에서
17세기 중엽부터 말까지 승장 사인비구와 쌍벽을 이루며 사장계(私匠系)를 이끌어 나갔던 김애립(金愛立)은 전라남도의 순천과 고흥, 경상남도의 진주, 고성 등과 같이 남해안에 인접한 지역을 중심으로 범종과 금고(金鼓), 발우(鉢盂)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발히 제작 활동을 하였던 직업 장인이다. 불룩하게 솟아오른 천판과 용뉴를 중심으로 연판문을 둥글게 돌아가며 장식하는 의장 표현은 김용암 종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으로서 김애립 범종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그는 대흥사명 흥국사 종(大興寺銘 興國寺鐘, 1665년), 운흥사 종(雲興寺鐘, 1690년), 능가사 종(楞伽寺鐘, 1698년)과 같은 범종을 만들었고 흥국사(興國寺) 발우(1677년), 청곡사(靑谷寺) 금고(1681년)와 청곡사 대발우(1684년)를 비롯하여 사장이면서도 유일하게 국가에서 감독한 불랑기포(佛狼機砲, 1677년)를 제작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도 매우 뛰어난 역량을 인정받았던 장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2부. “김애립의 범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