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놈은 필경 혹승지옥감이지. 극락은 무슨 얼어 죽을 개꿈이더냐. 너는 나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 말고 네 갈 길을 찾아라.” 스승님의 훈계는 이른 봄비처럼 내 눈시울을 촉촉이 적셔왔다. “그나저나 보성이란 놈은 여색을 밝혔다지?” 나는 흠칫 숨을 삼키고 망설였다. 스승님께 나와 보성의 인연을 말해야 하나? 거제도 수용소의 끔찍했던 나날을 스승님도 들은 바는 있을 것이다. 이제껏 나를 제자로 받아 주고 일언반구 거제도 얘기는 꺼내지 않았지만, 내 출신과 우리의 첫 만남은 분명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언청이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내가 말한 절름발이, 여인네는 누군지도 모른다. 공연히 입을 잘못 놀려 분란을 일으키기는 싫었다. “예, 뒷산 비구니들에게 추파를 던졌다고 했지요.” 나는 그냥 절에 와서 본 모습만 털어놓았다. 그 편이 나을 성싶었다. “지금쯤 아비지옥(阿鼻地獄)을 헤매고 있겠구나, 나무관세음보살!” 아비지옥은 부모를 죽인 자, 석탑을 훼손하고 현자를 죽인 자, 그리고 비구니를 농락한 놈들이 가는 곳이다. 쇠꼬챙이로 몸을 꿰어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열풍을 쐬면 살가죽이 홀랑 벗겨진다고 한다.
“저는 불지옥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스승님이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가뜩이나 스산한데 지옥 이야기를 꺼내니 더 썰렁했다. “불지옥을 살펴보자꾸나. 인간이 지옥에 떨어지는 기본 조건은 무엇이더냐?” “살인, 도둑질, 거짓말, 음행 그리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셔도 문제겠지요.” 나는 스승님이 멀쩡한 사람 잠을 깨우고 책을 뒤적이는 것이 못내 수상했다. 물 만난 고기처럼 펄펄 뛰며 좋아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불지옥도 여덟 가지나 되는데 이를 나누는 기준이 있더냐?” 나는 선원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암송했다. “등활지옥(等活地獄)은 살생한 자가 똥통에 빠지는 것이고 중합지옥(衆合地獄)은 도둑질, 음행을 저지른 놈들을 산더미로 찍어 누르는 형벌이죠. 규환지옥(叫喚地獄)은 술 먹고 지랄한 놈들을 끓는 가마솥에 처박아 두고, 대규환지옥(大叫喚地獄)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놈들 혓바닥을 길게 잡아 뽑습니다. 초열지옥(焦熱地獄)과 대초열지옥(大焦熱地獄)은 남을 속인 놈들을 골라 철판에 얹어 지져대는 벌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혹승지옥과 아비지옥입니다.”
“인간 욕심이 이것뿐이면 내세에서 갚기도 편하지. 배고픈 자는 돼지로 태어나고 명예, 금전욕은 고치를 버리고 날개를 펴는 나비가 되면 그만인 것을. 수면욕은 겨울잠 자는 뱀, 개구리만 돼도 늘어지게 풀 수 있고, 성욕은 한 번 흘레붙는 데 1초도 걸리지 않는 토끼가 제격이겠구나. 축생 중에서도 하루살이 같은 벌레가 되면 업을 없애는 시간도 짧아 좋지. 그런데 사람의 업이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니라.”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또 결과가 있는 법입니다. 억겁의 시간을 뛰어넘는 악연도 인연이요, 순간의 찰나에 마주치는 인연도 인연입니다. 어찌 되었건 두 사람을 죽인 자를 찾아야 악연의 고리를 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