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한동안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다. 일부러 그 흔적을 지워버린 존재. 역사 왜곡에 가깝도록 일부러 망각하고, 혹 꿈에라도 나오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외면하고, 무의식의 저편으로 흘려보냈던 여성. 그는 자기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 p.39 「I. 가부키초 네온사인」 중에서
쇼윈도를 지나치고, 예쁜 가게가 나오면 슬쩍 둘러보고, 여기저기서 건네는 전단지를 받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걷다 보니, 확 분위기가 일변하는 지역이 나왔다. 환한 대낮인데도 뭔가 음습하고, 관능적인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이 여기저기서 전단을 돌렸고, ‘풍속’이니 ‘안마’니 하는 간판이 연달아 나타났다. 이 공간 자체에 갖가지 욕망이 얽혀 있었다. 아, 여기가 바로 가부키초구나, 느낌이 왔다.
--- p.37 「I. 가부키초 네온사인」 중에서
“너희들은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이다.”
작은 강의실을 가득 채운 학생들을 향해, 정민이 선언하듯 말했다. 싸늘한 반응이 여기저기서 감지되었다. 본격적인 강의의 첫 시간.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강단에 서다 보면, 어떤 감 같은 것이 온다. 지금이 그랬다.
--- p.138 「II. 이케부쿠로 오리엔테이션」 중에서
확실히 둘의 연주 스타일이 달랐다. 힘을 바탕으로 쩌렁쩌렁 공간을 올리는 흑인의 트럼펫도 짜릿했지만, 다소 느슨한 듯하면서, 노련하게 받아치는 일본인의 태너 색스도 내공이 만만치 않았다. 덩치라든가 파워만 놓고 보면 일본인은 흑인에 명함도 내밀지 못할 상황. 하지만 막상 배틀이 시작되자, 그 대조적인 스타일이 오히려 묘한 앙상블을 엮어내고 있었다.
--- p.211 「III. 롯폰기 힐스의 미행자」 중에서
어느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노곤해졌다. 잠시 구석에 있는 돌멩이 위에 앉아 배꼽 정도에 수면을 맞추고 쉬는 사이, 돌연 안개를 뚫고 좌우 양편에서 여자가 한 명씩 나타났다.
--- p.265 「III. 롯폰기 힐스의 미행자」 중에서
“그 「세계엔 다시 눈길도 주지 말라는 거예요.”
“….”
“세상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것을 넘어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죠. 쇼코가 그렇게 된 거예요.”
--- p.213 「IV. 하코네의 아름다운 괴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