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1세)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부父 장기 이씨 창하昌夏와 모母 순흥 안씨 사이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 아버지는 철원공립보통학교 교원과 덕원 감리서 주사를 역임한 개화파.
1909년(6세)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 그 해 8월 아버지의 죽음으로 귀국 중 함북 배기미(梨津)에 정착.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수학.
1912년(9세)
어머니의 죽음으로 철원 용담으로 귀향하여 친척집을 전전함.
1915년(12세)
사립 봉명학교 입학.
1918년(15세)
사립 봉명학교 졸업. 이후 자기 손으로 인생을 개척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집을 떠나 원산 등지에서 2년간 객줏집 사환 등의 일을 함.
1920년(17세)
4월 배재학당 보결생 모집에 합격하나 등록하지 못함. 낮에는 상점 점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 나가 공부함.
1921년(18세)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스승으로 가람 이병기, 같은 학예부원으로 상급반에 정지용, 김영랑, 박종화 등이 하급반에 박노갑이 있었음.
1924년(21세)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예부장으로 활동. 6월 동맹휴교 주모자로 4학년 1학기에 퇴학. 이어 휘문고보 친구인 김연만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감.
1925년(22세)
일본에서 단편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하여 입선, 문단에 나옴.
1926년(23세)
4월 동경 상지上智대학 예과에 입학. 신문, 우유 배달 등을 하며 매우 궁핍한 생활 속에 나도향 등과 교우.
1927년(24세)
11월 상지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함. 각 신문사와 모교를 방문하여 일자리를 구하나 뜻을 이루지 못함.
1929년(26세)
《개벽》사에 입사. 《학생》《신생》 등의 편집에 관여함.
1930년(27세)
이화여전 음악과 출신의 이순옥李順玉과 결혼.
1931년(28세)
《중외일보》 기자로 근무. 폐간으로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옮김. 장녀 소명小明 태어남.
1932년(29세)
이전梨專, 이보梨保, 경보京保 등의 학교에 출강함. 장남 유백有白 태어남.
1933년(30세)
박태원, 이효석 등과 ‘구인회九人會’를 조직.
1934년(31세)
차녀 소남小楠 태어남.
1935년(32세)
《조선중앙일보》 퇴사, 창작에 몰두함.
1936년(33세)
차남 유진有進 태어남.
1938년(35세)
만주 지역을 여행함.
1939년(36세)
《문장》의 편집자 겸 소설추천 심사위원으로 활동(임옥인, 곽하신, 최태응 등이 추천됨) 이후 황군위문작가단, 조선문인협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
1940년(37세)
3녀 소현小賢 태어남.
1941년(38세)
제2회 조선예술상 수상.
1943년(40세)
강원도 향리(안협)로 낙향. 광복 전까지 이곳에서 칩거함.
1945년(42세)
문화건설중앙협의회, 문학가동맹, 남조선민전 등의 조직에 참여, 문학가동맹 부위원장, 민전 문화부장을 맡음. 《현대일보》 주간에 취임.
1946년(43세)
7~8월 경 월북. 〈해방전후〉로 제1회 해방문학상 수상. 10월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 여행.
1948년(45세)
8?15 북조선최고인민회의 표창장 받음.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국가학위수여위원회 문학분과 심사위원이 됨.
1950년(47세)
한국전쟁 중 낙동강 전선까지 종군. 12월 국방군의 북진을 따라 문화계 인사들이 이태준을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
1952년(49세)
남로당과 함께 숙청될 위기에서 소련파 기석복의 후원으로 살아 남았으나 문단활동은 미약함.
1953년(50세)
남로당파의 숙청이 끝난 가을 자강도 산간 협동농장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1960년대 초 산간 협동농장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짐(강상호, 〈내가 치른 북한 숙청〉, 《중앙일보》, 1993. 6. 7).
1954년(51세)
3개월간의 사상검토 작업 중 과거를 추궁당함.
1955년(52세)
이광수, 박창옥 등과 함께 비판당함.
1956년(53세)
소련파의 몰락과 함께‘구인회’ 활동과 사상성을 이유로 1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의 결의로 임화, 김남천과 함께 비판당함. 2월 ‘평양시당 관할 문학예술부 열성자대회’에서 한설야에 의해 비판ㆍ숙청당함.
1957년(54세)
함흥노동신문사 교정원으로 배치됨.
1958년(55세)
함흥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배치됨.
1964년(61세)
중앙당 문화부 창작 제1실 전속작가로 복귀함.
1969년(66세)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부부가 함께 삼. 이후 연도 미상이나 사망한 것으로 알려짐(<장현준의 증언>, 《한겨레신문》, 1991. 1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