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꿈꾸는 것을 즐기는 종족이다. …… 네 개의 다리를 숨김없이 드러내놓은 의자는 관능적이다. …… 의자의 관능은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삶의 에너지를 끌어올린다. …… 진짜 의자들은 춤추며 꿈꾸는 보헤미안들이다. …… 의자는 직립의 기술을 습득한 인간이 최초의 출발지를 찾아가는 여정에 놓인 사물이다." (의자 중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 내가 놓여 있는 공간을 나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물들이다. 때때로 내가 사물들을 관찰한다기보다 사물들이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 그런데도 나는 오래도록 고민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건넬 말을 기꺼이 받아줄 만한 사물과 만나야 한다. 내가 말을 걸어도 그가 자기 속내를 보여줄 의사가 전혀 없다면 곤란해진다. 사물의 속내란 내 무의식의 속내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수줍거나 완강한 자기 보호벽을 지니기 십상이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말 거느냐에 따라 글의 운명이 달라지곤 한다." (걸레 중에서)

"그들의 대화는 은밀하고도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 고여 있던 촛물이 아슬아슬한 경계를 지나다가 주르륵 흘러넘칠 때, 그것이 오래 울음을 참은 이의 눈에서 느닷없이 터지는 한줄기 굵은 눈물임을 봄비는 금세 알아차렸고 가르릉하는 작은 소리로 촛불을 위로하곤 했다. …… '타닥' 하는 소리가 촛불의 언어체계에선 '달밤인데 바람이 차가워'라든가 …… 촛불은 무욕하다. …… 자신을 태우면서 마침내 무소유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의 정결한 혼." (촛불 중에서)

"꽁꽁 동여매진 채 음지로만 유전하던 벙어리 생리대를 햇빛 쏟아지는 광장 아래 활짝 펼쳐놓고 네가 누구냐고 물어보는 일. …… 월경을 긍정하는 것은 음험한 비밀로 봉인되어 변방의 소문으로 떠돌기 일쑤인 여성의 몸에 대한 총체적인 긍정의 시작이므로. …… 뜻밖에도 내 초경의 기억은 화사하고 따뜻하고 충만한 것이었다. …… 내 몸에서 꽃이 피었다고 내 초경을 스스로 말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생리대 중에서)


"할 수만 있다면, 푸르스트가 사랑한 마들렌 과자 맛의 신비처럼, 저 얄상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휴대폰을 맛있는 커피 한잔과 함께 먹어치웠으면 좋겠다. …… 관계 맺기의 떨림과 설렘을 야금야금 먹어치어온 휴대폰을 커피에 적셔 으깨어 먹는 상상을 하면서 나는 낄낄거린다. …… 촉각은 원초적인 감각이다. …… 딱딱하고 차가운 기계 대신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손의 촉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이 조금쯤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 오고 간 말들의 질감에 따라 달디달거나 소태같이 쓰거나 닝닝하거나 짜디짠 여러 가지 맛들이 순간 저장되는 휴대폰!" (휴대폰 중에서)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2002년), 《도화 아래 잠들다》(2003년)의 시집으로 평단과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시인 김선우가 산문집 《물밑에 달이 열릴 때》(2002년) 에 이어 《김선우의 사물들》이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산문집으로 출간했다. <br/><br/>“나는 꿈꾸는 것을 즐기는 종족이다. …… 네 개의 다리를 숨김없이 드러내놓은 의자는 관능적이다. …… 의자의 관능은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삶의 에너지를 끌어올린다. …… 진짜 의자들은 춤추며 꿈꾸는 보헤미안들이다. …… 의자는 직립의 기술을 습득한 인간이 최초의 출발지를 찾아가는 여정에 놓인 사물이다.” (의자 중에서)<br/><br/>자유로운 상상력과 도발적인 표현으로 주목 받아온 시인 김선우는 ‘사물(事物)’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물들에 대해 시인이 갖는 이미지를 구체화하여 빚어낸다. 이러한 지은이의 사물에게 말걸기는 아주 독특하여,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산문의 틀을 벗어나 시인 듯하면서도 잠언인 듯 소설인 듯하고 그러면서도 산문인 듯하다.<br/><br/>“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 내가 놓여 있는 공간을 나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물들이다. 때때로 내가 사물들을 관찰한다기보다 사물들이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 그런데도 나는 오래도록 고민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건넬 말을 기꺼이 받아줄 만한 사물과 만나야 한다. 내가 말을 걸어도 그가 자기 속내를 보여줄 의사가 전혀 없다면 곤란해진다. 사물의 속내란 내 무의식의 속내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수줍거나 완강한 자기 보호벽을 지니기 십상이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말 거느냐에 따라 글의 운명이 달라지곤 한다.” (걸레 중에서)<br/><br/>사물들에게 말걸기는 바로 시인 김선우가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수줍거나 완강한 자기 보호벽을 지닌’ 김선우에게 말을 거는 일련의 과정이다. 숟가락, 거울, 의자, 반지, 촛불, 못, 시계들, 바늘, 소라껍데기, 부채, 손톱깎이, 걸레, 생리대, 잔, 쓰레기통, 화장대, 지도, 수의, 사진기, 휴대폰 등 20개의 사물은 지은이에게 말을 걸어 꽁꽁 숨겨졌던 속내를 드러내게 한다. 2개월마다의 시간 텀을 두고 쓰여서인지, 사물들에 말걸기라는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 편마다의 느낌은 전연 다르며, 길지 않은 내용임에도 한마디 한마디가 쓴 약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듯이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br/><br/>“그들의 대화는 은밀하고도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 고여 있던 촛물이 아슬아슬한 경계를 지나다가 주르륵 흘러넘칠 때, 그것이 오래 울음을 참은 이의 눈에서 느닷없이 터지는 한줄기 굵은 눈물임을 봄비는 금세 알아차렸고 가르릉하는 작은 소리로 촛불을 위로하곤 했다. …… ‘타닥’ 하는 소리가 촛불의 언어체계에선 ‘달밤인데 바람이 차가워’라든가 …… 촛불은 무욕하다. …… 자신을 태우면서 마침내 무소유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의 정결한 혼.” (촛불 중에서)<br/><br/>하지만 그러한 글 속에 간간이 보여지는 지은이의 어릴 적 이야기인 중학교 시절 미래의 내 남자를 보기 위해 장독대 위에서 입에 칼을 물고 거울을 보던 소녀, 갓 등단한 풋내기 시인 시절 한눈에 반해 동거를 시작한 페르시아산 아기고양이 봄비, 새 옷을 입기 위해 일부러 넘어져 바지를 찢던 기억, 닳을 대로 닳은 러닝셔츠로 만든 걸레에 가졌던 창피함, 생계를 책임지면서 처음으로 가져본 한 칸짜리 옥탑방 이야기 등은 지은이 자신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여서, 읽다보면 저절로 고개를 돌려 나만의 사물이 무엇이 있을까 두리번거리게 되고 혹은 내 주변의 사물들이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br/><br/>“꽁꽁 동여매진 채 음지로만 유전하던 벙어리 생리대를 햇빛 쏟아지는 광장 아래 활짝 펼쳐놓고 네가 누구냐고 물어보는 일. …… 월경을 긍정하는 것은 음험한 비밀로 봉인되어 변방의 소문으로 떠돌기 일쑤인 여성의 몸에 대한 총체적인 긍정의 시작이므로. …… 뜻밖에도 내 초경의 기억은 화사하고 따뜻하고 충만한 것이었다. …… 내 몸에서 꽃이 피었다고 내 초경을 스스로 말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생리대 중에서)<br/><br/>뿐만 아니라 여자 스스로도 이야기하길 꺼려하는 월경에 대해서도 자신의 초경 때 경험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있으며, 여행지에서 만난 두 명의 가난한 벗들은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쉼터와 버려진 강아지를 데려다 기르는 단체를 꿈꾸며, 꽁꽁 언 손으로 감자를 긁던 어머니와 자신의 수의를 직접 지으시고는 화사하게 웃으시는 어머니, 늘 정갈한 모습의 할머니, 움푹 패인 숟가락 속의 지구 어머니, 전쟁터의 군인들이 총 대신 소라껍데기를 귀에 대기를 바라는 등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전에 출간한 두 편의 시집이나 산문집에서 보여주었던 여성성과 생명성은《김선우의 사물들》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br/><br/>“할 수만 있다면, 푸르스트가 사랑한 마들렌 과자 맛의 신비처럼, 저 얄상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휴대폰을 맛있는 커피 한잔과 함께 먹어치웠으면 좋겠다. …… 관계 맺기의 떨림과 설렘을 야금야금 먹어치어온 휴대폰을 커피에 적셔 으깨어 먹는 상상을 하면서 나는 낄낄거린다. …… 촉각은 원초적인 감각이다. …… 딱딱하고 차가운 기계 대신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손의 촉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이 조금쯤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 오고 간 말들의 질감에 따라 달디달거나 소태같이 쓰거나 닝닝하거나 짜디짠 여러 가지 맛들이 순간 저장되는 휴대폰!” <br/><br/>이번에 출간하는 산문집 《김선우의 사물들》은 CJ 격월간 사외보인 <생활 속의 이야기> 에 연재한 글로서, 2002년 3월부터 2005년 6월까지 3년 4개월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의 작가의 긴 호흡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지은이 또한 오랜 시간을 들여 느리게 머뭇거리면서 풀어놓은 글이기에 하루에 한 사물씩 천천히 씹어가면서 읽기를 권하며, 추천사의 글을 쓴 소설가 공선옥도 ‘아주 많은 시간을 들여 또박또박 천천히 읽기'를 역시 거듭 부탁하고 있다. <br/><br/><br/>* 소설가 공선옥의 추천의 글<br/><br/>《김선우의 사물들》을 아주 많은 시간을 들여 또박또박 천천히 읽었다. 김선우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 어머니를 떠올렸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시면 온몸을 기울여, 내 온 귀를 어머니의 말씀에 집중해야 했다. 아버지의 말씀은 너무나 크고 또렷한데 어머니는 그러지 못하셨다. 그렇지만 이윽고 어머니의 말씀을 다 듣고 났을 때, 나는 아하, 하고 무릎을 쳤다. 바로 그 말씀이셨구나! 그러면서 때로 빙그레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때로 슬몃, 눈가가 젖어오기도 했다. 우리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가 바로 그 말씀을 하시려고 그다지도 힘겹게 입을 여셨던 거구나. 무슨 말씀이건 한참 뜸을 들이고 그러다가 수줍게 한마디 하시곤 하던 우리 어머니. <br/>《김선우의 사물들》이 그렇다. 오래오래 생각하고 생각해서 힘겨웁게 나오는 어머니의 한마디 한마디 같다. 김선우가 오래 뜸 들여 내놓는 한마디 한마디에 나는 조용히 웃기도 하다가 조용히 눈물짓기도 하였다. 아, 김선우가 그다지도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구나.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말랑말랑한 힘’ 말이다.<br/><br/><br/>* 자서自書<br/><br/>여기 묶인 글들은 2002년 봄부터 쓰기 시작했다. <br/>두 달에 한 번씩 격월간지에 연재하던 글이니 꼬박 3년 4개월 만에 스무 편의 글로 책 한 권을 이루게 되었다. <br/>3년 4개월. 그 사이 나는 삼십대 초반에서 중반이 되었고 이제 슬슬 아름다운 나무묘지를 꿈꾸어도 좋을 땅을 찾아 오두막 한 채를 섬길 꿈을 꾸고 있다. <br/>글의 차례는 발표했던 순서를 그대로 살려 실었다. 세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나를 흘러가는 동안 내가 오래 응시했던 것들의 젖은 자리랄지, 뒷모습이랄지 하는 것들이 고스란히 앉아 있는 셈이다.<br/>그러나 지금 이 책을 손에 든 당신은, 순서일랑은 잊고 마음에 드는 제목부터 건반을 튕기듯 읽어주면 좋을 것 같다. 다만 너무 빠르지 않게, 가능하다면 하루에 한 사물씩만. 책을 읽는 그 순간 당신이 보고 있는 사물의 말을 오직 당신 식으로 들으면서……. <br/>보이는 것의 뒷면은 안 보이는 것의 정면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다만 사랑이 여기 실린 사물들을 존재의 앞마당으로 불러냈다고 믿고 싶지만, 고백하건대 이 역시 나를 찾아 떠난 여행에 다름 아니다. <br/>내게 말을 빌려준 사물들에게 감사한다. 그들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청자이길 바랐으나, 그들이 오히려 내 말을 더 많이 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