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정의사회를 위한 구호를 외쳐 달라는 것도 아니고, 미국과 전쟁을 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까닭 없이 때린 놈 잡아다가 벌 받게 하자는데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니가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래.”
사실 부장이 어찌해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매뉴얼대로 기사를 선별하고 선택해서 적시에 내보내면 그만이었다. 내 분노와 정의가 하늘을 찌른다고 해도 선배인 부장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 기사만큼은 포기할 수 없어 나는 끝까지 부장에게 매달렸다. 부디 그의 죽어 있던 용기가 부활하거나 그가 실수를 저질러 내가 쓴 기사를 그대로 내보낸다면 만세를 부를 일이지만 그런 일은 내가 복권에 맞을 확률보다 더 낮았다.
--- p.17
“오키나와로 나갈 때는 요란하게 배웅을 해주더니 돌아오니까 아무도 반기지 않더라. 하긴 누가 쳐다볼까 무서워서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중략)… 그렇게 다시 돌아간 고향인데……. 엄마는 저녁 밥상을 차려주면서 낡이 밝기 전에 다시 서울로 떠나라고 말씀하셨지.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오키나와에서 있었던 일들이 첩첩산중 정선까지 흘러들어 남부끄러워 못 살겟다고 하더라. 태평양을 건너온 소문이 무지와 만났으니 다시 산을 넘어 집을 떠나라는 소리였다. 그 소릴 들으니 참담하더라. 굴욕과 능욕도 모자라 참담함까지 당하고 나니 밥숟가락 쥔 손이 저절로 풀리더구나. 상처투성이 새끼를 보듬지 않고 내치는 어미라니! 그 밤 엄마를 한참 노려보다가 집을 나왔다. 사람에 대한 내 그리움은 거기까지였다.”
--- p.54~55
“다 묻고 조용히 눈 감으려고 했어요…….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어쩌면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겠지요. 그런데 민자가 그 또한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나만 살다 가는 세상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나만 입 다물고 살다 죽으면 끝인 세상이 아니라고, 더 늦기 전에 용기를 내라고 했어요.”
순이 씨가 내 손등을 가만가만 두들기며 말했다.
“제가 변변치 않은 기자라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내가 아주 오래전에 겪은 일인데, 죽기 전에 세상에 알려야 할 것 같아서요.”
--- p.59
“내 이름은 홍순이입니다. 나이는 여든아홉이고 고향은 천안역에서 가까운 대흥동입니다. 천안역 마당에 높은 콘크리트 탑과 커다란 측백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왜놈들이 지은 이층집도 있었고 자전거도 있었고 시커먼 자동차도 있었습니다. 나는 양대 여학교에 다녔습니다. 내 꿈은 나쓰메 소세키 같은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케시는 참 훌륭한 선생님이었습니다. 열일곱에 집을 떠났고 지금껏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천안은 능수버들이 많습니다. 엄마 이름은 양순남, 아버지 이름은 홍백기입니다. 나는 홍순이입니다.”
…(중략)…
“자신이 누구라는 걸 잊지 않으려고 가끔 저래.”
--- p.60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뻘건 눈으로 그놈들을 향해 소리치는 것뿐이었다. 다른 애들 또한 나와 똑같은 형국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놈들의 행태는 멈추지 않았다. 열일곱 내 인생이 어딘지도 모르는 허허벌판 한가운데서 사나운 짐승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희뿌연 대기를 타고 굵은 눈송이가 내게로 쏟아졌다. 나는 멀리 우우거리며 달려오는 짐승들의 소리를 들었다. 놈들의 광폭한 허기가 내 놈을 관통하며 모든 기억을 끊어놓았다. 쪼개지고 찢어진 몸이 마침내 폭발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느낌이었다. 갈래머리 여학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양조장집 고명딸 순이는 겨울 벌판 한가운데서 승냥이들의 달콤한 먹이가 되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정지된 느낌이었다.
--- p.87
“어두운 역사라 묻어버리고 싶다는 거야? 보수적인 남자들 더러는 이 문제에 대해 부끄럽거나 망측하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 자신들의 어머니가 당한 일이고 딸들이 당한 일이여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아니면 개인이 아닌 역사와 국가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는 걸까? 정치적으로 보자는 게 아니라 같은 인간에게 당한 짐승 같은 폭력을 얘기하는 거야.”
“선배, 작정한 사람처럼 왜 그래? 어제오늘 일이 아니잖아.”
“너처럼 생각하는 인간들 때문에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는 거야.”
--- p.145
“여기 있어!”
나는 떨고 있었다. 종이에 적힌 글자일 뿐인데, 칠십 년 전의 무라타 다케오가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곱슬머리와 짙은 눈썹, 눈썹 바로 아래 검은 점이 혹처럼 박혀 있는 사람이 무라타 다케오였다.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시뻘건 담뱃불로 순이 씨의 사타구니를 지져댔던 그가 맞을 것이었다. 좃토! 라고 소리치며 그녀에게 침을 뱉고 온갖 패악을 부렸던 무라타 다케오. 이름을 확인했을 뿐이고 죽었을지도 모르는 유령 같은 그에게 나는 칠십 년 전의 순이 씨처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 p.227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내 남편은 그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라면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남편은 짐승이었습니다. 하느님도 용서하지 못할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나는 남편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을 대신해 죽을 때까지 당신들에게 사죄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카이 마사토가 아니었고, 나는 순이 씨가 아니었다.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은 그녀와 내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전쟁과 폭력의 책임은 사카이와 순이 씨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문제이기도 하고 우리의 문제이기도 했으며 우리와 그녀의 문제이기 전에 사카이와 순이 씨의 문제였다.
--- p.242~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