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젠더와 성역할에 대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변화를 반영한다. 참여해 주신 많은 작가분들이 오랜 시간 미술계와 가정에서 겪은 성차별적인 경험과 그러한 여건 속에서도 작품 활동에 정진한 인고의 세월이 비로소 최근의 사회적 변화와 이 책을 통해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터뷰 과정은 70~80대 선생님들에게는 지나간 이야기를 더듬는 기회가 되었고, 50~60대 작가분들에게는 최근 미투를 통하여 일어난 변화를 반기면서도 ‘세상’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하여 기대 반, 우려 반을 표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젊은 40대 작가들에게 N번방 사건이나 미술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희롱, 성폭력 사건은 진행형이다.
--- 「 ‘감사의 말’ 」중에서
지인인 작가분이 요새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면 여성 작가들이 상당히 잘나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 중에 엄마 작가는 몇이나 될까 직접 세 보게 되었다는 말이 기억에 남더라고요. ‘잘나가는’ 여성 작가들의 공식으로 특정 학교를 나오고 유학을 다녀오고, 아니면 외국에 거주하고, 아이는 없거나 아주 늦게 낳는 것이 있잖아요.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이전 세대는 본인이 엄마인 것을 숨겼다면, 요새는 아예 결혼을 인생 계획에 넣지 않는 게 대세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결혼은 여성에게 결국 희생이고, 적어도 성공하려면 결혼은 해도 아이를 낳으면 뒤처진다는 생각이 여성 작가들 사이에 퍼져 있는 것 같아요.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아이를 갖지 않는 여성 작가들이 더 눈에 띄니까요.
이 책을 만들게 된 데는 또 다른 배경이 있어요. 아예 성공하기 위해서 결혼을 미루는 여자 작가들이나 개인적인 삶을 공공의 장소에서 밝히는 것을 꺼렸던 이전 세대와 달리 요새 젊은 작가들은 페이스북을 통해 육아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하기도 하잖아요. 더 다양하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여성 엄마 작가의 이야기가 공유되더라고요. 육아나 남편과의 관계에 있어 세대마다 다른 이야기들이 구체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 「 ‘들어가는 말’ 」중에서
1장은 한국 여성 미술의 선구자이자 회화, 사진, 설치, 장소 특정적 작업에 이르는 예술적 장르를 개척한 윤석남, 박영숙, 홍이현숙을 대상으로 했다. 40대 초반에 이제까지의 가사 노동 삯을 남편에게 요구하면서 화가의 길에 접어들기 시작한 윤석남, 서울 서초동 금호아파트 지하 보일러실에 화랑을 만들어서 여성 작가들의 모임과 전시 장소로 사용했던 박영숙, 만삭의 몸으로 첫 개인전을 가진 후 설치 미술가로 거듭나기까지 방구석에서 대패질하면서 본의 아니게 가족 구성원들을 ‘적응’시켰던 홍이현숙. 아이를 키우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가족 내 대소사를 이어 오면서도 작업의 끈을 놓지 않고 지속해 온 한국 여성 미술계 최고참 선배 작가들의 내공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 「 1장 ‘언니들은 아직도 달린다’ 」중에서
2장에서는 50대 후반의 정정엽과 50대에 막 들어선 ‘공간:일리’, 그리고 ‘사공토크’의 대표 작가, 부부 작가 듀오 진달래의 일원인 작가 진달래, 설치 작가 김시하를 인터뷰했다. 이들은 본격적으로 대학에서 여성학을 배우고 여성 미술의 태동을 목격한 세대다. 동시에 1990년대 말 대안 공간 중심의 한국 미술계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덕을 보았다기보다는 소외되기도 했다. 국내 미술계에서 유학생 위주의 특정 대안 공간이 내세우는 여성 작가들이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했고, 잘나가는 국제적인 스타일과 그렇지 않은 스타일의 구분이 더 극명하게 나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실히’ 대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대학원 졸업 이후 ‘최전방’ 미술계에서 자리 잡기는 어려워졌다. 따라서 이들은 지난 20여 년간 급변하는 한국 미술계의 상황에서 개인적인 경력 단절과 전통적인 미술 교육의 공백을 몸소 체감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40대 후반을 지나서도 작업을 지속하는 여성 작가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들에게 한국 미술계의 변화가 작가에게 어떻게 투영되었고 이들은 생존을 위해 어떤 전략을 사용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 「 2장 ‘여성의 연대가 시작되다’ 」중에서
3장에서는 1970년대 후반 출생으로 현재 한참 육아와 작업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정직성, 김도희, 조영주, 국동완 작가를 인터뷰했다. 이 여성, 엄마 작가들은 국내 미술계에서 1990년대 후반 대안 공간이 생겨나고, 예술적 매체나 장르가 급격하게 확장되며, 국내 대학에서 여성학 교육이 시작되던 시점에 미술대학을 다니거나 작가의 길에 접어든 세대다. 그러나 여전히 미술계에 계속되는 젠더적 차별을 경험했고 여성, 엄마 작가로서 가정사를 노출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은 않은 세대이기도 하다. 동시에 여성 작가가 성공하기 위해서 결혼이나 육아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성공한’ 동료 여성 싱글 작가의 예를 보면서 뼈저리게 경험한 세대다. 따라서 우리 시대 여성 미술의 의미, 여성성을 다루는 방식, 육아의 의미를 새롭게, 그러나 보다 현실적으로 정의해 가고 있다.
--- 「 3장 ‘‘동등하다’는 환상: 말과 행동의 이중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