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히스로 공항에 곧 착륙합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2020년 10월 31일, 영국에 도착했다. 이 년 동안의 영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거창하고 어려운 계획은 세우지 말고 그저 영어라는 애증의 언어를 제대로 배워오자고 마음먹었다. 운이 좋다면 영국의 독특한 생활 방식과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 기왕이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며 일 중독에는 빠지지 말자는 다짐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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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가을,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처음 가서 살게 된 영국에는 아주 독특하고 신기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듬해 봄의 바스부터 여름의 옥스퍼드와 런던, 데번, 가을의 런던과 겨울의 에든버러까지, 영국의 곳곳을 다니며 영국 문화를 배우고 사람들을 만났다. 중학생 시절의 나는 상상이나 했을까? 한국인인 내가 이렇게 영국 현지인을 만나 함께 지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영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생계를 잇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상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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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31일 영국에 입국해서 계속 알렉스네 집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직장과 집을 구할 때까지만 지내기로 한 것이었는데 알렉스네 가족들이 계속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많이 도와준 덕분에 웨일즈 집에서 계속 생활하게 되었다. 일 년간 알렉스네 가족은 이사를 두 번이나 했고 나는 세 곳의 집에서 모두 살아보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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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영국에서 하루 날씨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아침에는 비가 왔다가 점심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저녁에는 다시 비가 폭포처럼 쏟아붓는 그런 날이 자주 있다. 지금도 날씨가 굉장히 맑지만 언제 갑자기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릴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영국 사람들은 만나면 제일 먼저 날씨 이야기를 한다. 날씨를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영국 사람들은 신나서 30분도 넘게 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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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의 방, 고객들과 앉아서 상담하는 공간은 너무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오랫동안 감상하며 사진을 찍고 있으니 옆에 있던 직원이 “사진 찍어드릴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냉큼 “네”라고 대답하고 카메라를 건넸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잘 나오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고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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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가보니까 어때? 음식이 정말 맛이 없어?” 많은 사람이 물어본다. 맛이 없다기보다는 한국인의 입맛에는 잘 안 맞는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피시 앤 칩스(생선튀김과 감자튀김)같은 메뉴가 특히 그렇다. 맛이 엄청 자극적이고 환상적이지는 않다. 음식의 색이 대부분 노르스름하거나 갈색이다. 한국 음식들이 대부분 빨갛고 주황색인 것과 비교하면 색깔만으로도 음식의 향과 맛이 크게 다르단 걸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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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메뉴를 고르면 이때부터 눈치 게임이 시작된다. 영국 식당에서 직원을 소리높여 부르는 것은 거의 있어서는 안 될 행위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처음 영국에 갔을 때는 그 점이 너무 답답했다. 일본에서도 “스미마셍”하는 정도로 직원을 부르는 건 괜찮았는데 영국은 아예 소리 내 부르는 게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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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성향의 나는 엄청난 에너지를 충전하고 돌아오곤 한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그림을 보고 소호에서 한식을 먹고 넓은 세인트 제임스의 공원(St James’s Park)을 걷다가 공원의 호숫가에서 그림을 그리는 평화로운 날들을 종종 즐겼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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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할 때는 지하철(tube)을 타는 게 빠르고 좋지만 나는 최대한 런던의 상징인 빨간 이층버스를 타려고 한다. 런던의 지하철에서는 인터넷도 통하지 않고 바깥 구경도 어려워서 조금 답답하다. 버스를 타면 조금 돌아가서 시간은 걸리지만 런던의 풍경을 감상하며 갈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 시간이 넉넉한 여행객에게는 버스 이동을 추천한다. 버스의 이층에 올라가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런던 여행의 묘미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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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외울 정도로 빈번히 방문한 장소는 옥스퍼드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블랙웰(Blackwell bookshop)이다. 서점은 푸른 간판에 문이 두 개인데 코로나라 출구와 입구가 나뉘어 있었다. 입구를 통해 들어가니 생각보다 좁고 아늑하고 평범한 동네 서점 같았다. 입구 맞은편에 한국과 일본 책 판매대가 있어서 한국 책들, 이를테면 한강 작가의 『흰』 같은 작품이 눈높이에 진열되어 있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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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피시 앤 칩스를 먹는 영국 사람들의 문화는 진짜였다! 함께 카페에 가서 다들 피시 앤 칩스를 먹을 때 나는 가먼 스테이크라는 돼지고기를 먹었다. 생선튀김보다는 선호하는 음식이었다. 카페에서 식사하는 동안에도 하늘은 구름 끼고 흐린 날씨였다가 약간의 비가 내리기도 하고 뜨겁도록 화창한 날씨로 바뀌기도 하는 등 여러 날씨를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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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 영국의 옥스퍼드, 런던, 바스, 브리스톨, 웨일즈의 수도 카디프, 언급하지 못했지만 책 마을 헤이온와이, 여름 휴양지 데번과 콘월,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 등에 다녀왔다. 영국의 4개 나라 중 벌써 3개 나라의 수도를 방문한 셈이다. 코로나 시대지만 여행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조심히 기차에 올랐다. 일 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영국 여러 곳에서 많은 추억을 쌓아 다행이다. 남은 나날은 영국에서 또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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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한국어를 배우며 한국에서의 유학 생활을 꿈꾸는 학생, 한국에 이미 살면서 직장을 다니는 이탈리아 학생, BTS를 좋아하는 미국에 사는 일본 학생, 일본에 사는 캐나다 학생 등 유럽, 아시아, 미국 등 각지에서 한국어를 배우려고 나와 수업을 한다. 수업을 준비하고 한글, 한국 문화와 최신 뉴스로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국어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고 말한다. 그들의 마음이 너무 예뻐 나는 늘 감사하다. 자랑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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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하는 공부의 한계를 느꼈고 유학 대신에 선택한 것이 영국 워킹홀리데이였다. 그 후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고 영국에 가게 되었다. 영국에서의 생활로 문화 등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영어를 제대로 잘 배우자는 생각이었다. 영어를 잘하면 편리하고 좋은 점들이 많이 있겠지만 나의 영어 공부 목적은 그동안 결핍되었다고 생각한 영어에 대한 갈증을 채우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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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공원은 거의 강아지들의 놀이터다. 개 없이 공원에 오는 사람은 조금 수상할 정도다. 우스갯소리로 스타벅스에 핸드폰도 노트북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커피만 마시는 사람이 무서워 보인다는 인터넷 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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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영국 사람들은 잘 참는다. 참는 게 미덕이라 생각한다. 원하는 게 있더라도 표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위대한 업적과 명예로운 삶보다는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배우고 싶어도 쉽게 체득하기 힘든 마음가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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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 중산층의 기준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프랑스 퐁피두 전 대통령이 저서에서 언급한 프랑스 중산층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외국어를 하나 정도 할 수 있어야 하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한다.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어야 하며 남들과는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으며 약자를 돕고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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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은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해서 거실 맞은편의 작은 방에서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강아지 오스카와 함께 있다. 가끔 오스카가 공을 물어오면 던져 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휴식을 취한다. 우리가 가끔 오스카나 키키가 보고 싶어서 일 층으로 내려가면 키키는 고르릉거리며 우리를 반겨주고 오스카는 배를 보이게 누워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로즈는 키키가 귀여워서 ‘오, 키키’ 하며 고개를 손에 비비는 모습에 감탄하고 폴은 오스카를 못 말리겠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짓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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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대해 자신감이 바닥이었을 때도 영국 가족들은 나를 ‘아티스트(예술가)’라고 부르며 존중해주었고 그게 너무 큰 힘이 되어 그림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덕분에 친척분의 손녀 그림과 강아지 그림을 그려 드리고 강의 다섯 번은 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을 벌었다. 이렇게 계속 그림을 그리며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나의 그림에 대해 더 확신을 갖고 자랑스러워해 주는 로즈와 폴, 알렉스 그리고 알렉스의 여동생에게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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