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설명에 따르면 세계는 거룩한 창조주의 일이 아니고, 창조가 단 한 번뿐인 사건도 아니다.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오만과 불복종으로 인해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다. 불교에서는 그런 ‘전락(轉落)’을 믿지 않고, 갈애(渴愛)와 무지(無知)라는 심리학적 문제를 인간이 처한 곤경의 원인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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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우주관에는 또한 기독교의 우주 개념과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불교 체계에서는 어느 누구도 주어진 영역 안에 영원히 머물도록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옥은 영원한 저주의 장소가 아니고, 천상은 영원한 행복의 장소가 아니다.
--- p.42
까르마의 의미가 결정론과 같지 않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정론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미리 예정되어 있고 운명이나 숙명에 의해 일어난다는 믿음이다. 붓다는 이런 의미에서 까르마와 결정론적 운명(niyati)을 분별했다. 그리고 삶에서 임의의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고 인정했다.
--- p.48
붓다가 선언한 해결책은, 고통의 문제에 대한 답이 윤회의 수레바퀴 안에서 좀더 나은 재생에 있지 않다는 것이고, 오직 그 바퀴로부터 벗어나는 열반이 마지막 해결책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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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붓다’의 밝혀지지 않은 행적에 관한 문제는 ‘역사적 예수’를 찾는데 직면하는 문제와 비슷하다. 붓다가 죽은 이후 몇 세기 안에, 유통된 여러 가지 단편들과 이야기들로부터 전형적인 전기가 종합되었고, 높은 수준의 문학적 창작물로 보전되었다. 그러나 가장 초기의 이야기들조차 많은 부분이 윤색되었고, 역사적 실재를 가리는 성인전(聖人傳)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 p.59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 아난다 존자가 이에 관해 명확히 물었을 때 붓다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붓다는 결코 자신을 승단의 지도자라고 여긴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비구들은 자기 자신을 귀의처로 삼고[自歸依], 법을 자신의 섬이며 피난처로[法歸依]41, 계율(사원의 규범)을 스승으로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고 했다.
--- p.84
불교에 처음 접근한 많은 사람들이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가 드러낸분석이 비관적인 것을 눈치채고, 이것이 아주 나쁜 정보가 아닌지 의심한다. 둑카를 ‘괴로움’으로 번역한 것이 이런 인상을 강화했고, 그로 인해 붓다가 인생을 끊임없는 괴로움이라고 믿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붓다의 의도가 아니다.
--- p.94
붓다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는 붓다가 35세에 보리수 아래 앉았을 때 ‘열반’을 성취했고, 80세에 죽을 때 ‘마지막 열반[槃涅槃]’을 성취했다고 한다. 이 두 열반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 p.102
열반은 팔정도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열반을 구성하는 것이 팔정도 자체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팔정도를 따름에 있어서 우리는 붓다처럼 행동하고, 붓다처럼 행동함에 의해서 우리는 점차적으로 붓다가 된다. 팔정도는 본질적으로 자기 변형, 변화의 계획, 혹은 정신적 변모의 수단이다. 팔정도는 깨닫지 못한 보통 사람을 붓다로 바꾼다.
--- p.109
사원의 소명은 더이상 금욕적이지 않았고, 고행주의와 쾌락주의 사이의 ‘중도(中道)’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을 강조해 나갔다. 이는 실로 이루기 어려운 대단한 진전이었다.
--- p.123
칙령을 통해서 본 아쇼카 왕의 다르마의 내용은 본질적으로 재가불자에게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다르마는 “적은 죄와 친절함, 자유, 진실함, 그리고 청정함의 많은 선업으로 구성된다.”라고 말한다. 아울러 평화로움, 신심, 종교적 인내, 열의, 부모와 스승에 대한 존경, 예의 바름, 자비, 감각의 통제, 그리고 평정심과 같은 도덕적 덕성을 국민에게 권장하면서 아버지처럼 충고한다. 사성제(四聖諦)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과 같은 전문적인 불교 교리는 언급하지 않는다.
--- p.162
대승불교의 혁신적인 교의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붓다의 본성과 실재에 관한 새로운 이론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이상으로 대두시킨 보살에 대한 강조였다. 이 새로운 길에는 ‘바라밀(波羅蜜, p?amita)’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완성’을 향한 수행과 그 바라밀들 중에서 중요한 두 가지인 ‘자비’와 ‘방편’에 대한 강조가 있었다.
--- p.193
숙고의 상태에서 나올 때, 명상자는 결가부좌한 다리를 풀기 전에 먼저 이렇게 생각한다. ‘절대적 관점에서 볼 때 이 모든 사건들은 본질이 없으나, 관념적 실재 안에서 그것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는 사람들이 모든 것이 실재라고 생각함으로써 그로 인한 온갖 슬픔을 경험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가엾게 여기는 대연민심을 일깨운다. 그 자신은 실재를 보지만, 대연민심으로 자신의 통찰력을 모든 중생들에게 베풀기 시작한다.
--- p.244
모든 종교적 현안에 재가신도들이 훨씬 더 참여하게 된 계기는 승가의 주요한 후원자인 왕권이 사라지고, 인쇄된 문헌이 보급되고 불교 가르침을 읽고 배우는 교육이 늘어남에 따라 좀더 불교에 접근하기 쉬워졌기 때문이다.
--- p.262
육식이 《율장》에 의해 명확히 금지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채식주의가 규범적인 수행이 되었다. 사원들은 종종 토지 소유권자가 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중국의 사원 안에서 승려들의 일상생활은 대체로 전통적인 중국의 가정생활을 반영했는데, 이것은 대부분의 중국 사원들이 삭발 순서에 따른 승랍(僧臘)을 엄격히 존중하는 관계와 위계질서로 드러났다.
--- p.302
마오쩌뚱이 이끌었던 당시의 중국공산주의는 대체로 티베트 종교와 그 중에 서도 특별히 불교를 자신들의 사상과 반대되는 삶의 오래된 구식의 잔재로 보았기 때문에, 티베트의 장엄한 사원들을 대부분 파괴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비구와 여성 출가자들을 처형했다.
--- p.346
미국에서 불교는 한편으로는 대체로 아시아 이민자들 고유의 종교인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주로 지적인 매력과 영적 실천에 대한 관심으로 불교를 받아들이던 유럽계 미국인 집단의 증가에 기반해서 종교로 뿌리를 내렸거나 적어도 개인적인 관심사의 진지한 주
제가 되었다.
--- p.367
참여불교(Engaged Buddhism)에 대하여 어느 정도 현시대의 관심사에 조응하여 현대적인 것으로 서서히 나아간 ‘새로운’ 형태의 불교라는 의견과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불교의 연장일 뿐이라는 의견으로 나뉘어져 있다.
--- p.388
인간의 존엄성은 불교에서는 역사적인 인물인 고타마 붓다와 불교전통 속의 성자들에 의해 입증된 것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인간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 같다. 붓다는 인간 잠재력의 생생한 기념비이다.
--- p.392
생태 관련 서적에 무아(an?man), 공(??yat?), 연기(prat?ya-samutp?da), 업(karma) 등 불교 가르침에 대한 설명들이 포함되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가르침은 환경보호를 장려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연결이 어떻게 확립될 수 있는지는 설명되어야 할 숙제로 남겨져 있다.
--- p.396
미국의 불교도에 의해 미국의 생태불교(eco-Buddhism)의 근본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환경론자들에 의해 실제로 전통이 어떻게 해석되었는지가 중요한 지점인데, 이안 해리스(Ian Harris)의 의견에 따르면 “생태불교란 이름으로 포장된[假裝] 다른 것들이 많다. […] 분석해 보면, 스피노자의 철학, 광적인 뉴에이지(New Age) 신앙과 극도로 선별된 불교와의 불안한 동행이 드러난다.”라고 했다. 참여불교가 단기간에 실용적이고 조직적인 측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신앙, 수행 및 가치가 불교신행의 참된 표현임을 입증해야 한다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 p.398
흥미롭게도, 불교도가 되는 사람들은 특정 신앙이나 교리에 대한 신앙을 밝히기 위해 부름(call-up)을 받지 않는데, 이는 불교에서 도덕적 행위가 교리나 신조보다 더 중요함을 드러낸다.
--- p.407
연민(karu??)은 불교의 모든 종파에서 매우 가치 있는 덕목이며, 특히 대승불교에서 그렇다.
--- p.416
군국주의는 또한 근대에 불교 집단이 적극적으로 일본 민족주의를 지지했던 증거이기도 하다. 선종과 정토종은 1937~1945년 중국과의 전쟁에서 재정 지원을 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카 각카이(創價學會)를 제외한 대부분의 불교 종파들은 일본의 연합국에 대한 전쟁을 지지했다. 유명한 선사들은 열렬한 전쟁 옹호자가 많았으며, 젠[禪] 불교 사원은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폭탄이 장착된 비행기를 몰고 자살 공격을 감행하기 전에 심리적 안정을 찾는 곳이었다.
--- p.422
이라크 전쟁 문제에 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불교 지도자들은 세 가지 주요한 점을 지적하는 경향이 있다. 첫 번째는 ‘9·11’을 초래한 원인을 완전히 이해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연기법에 대한 교리를 언급하면서 그들은 사건이 무작위로 발생하지는 않고 많은 수준에서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공격에 이르게 된 상황이 이해되고 다루어질 때까지 지속적인 해결책은 가능하지 않다. 두 번째 요점은 힘에 힘으로 반응하는 것은 잘못이란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폭력은 거의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폭력 사태와 양측을 더욱 멀어지게 하는 보복의 순환으로 이끈다고 한다.세 번째 요점은 갈등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우리가 했을 수도 있는 부분에 대한 반성과 자기비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p.425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복제에 대한) 이런 신학적인 반대는 대부분 사라진다. 불교는 초월적 존재를 믿지 않으며, 인간이 그의 일을 복제하려는 시도를 한다고 상처 입을 신적인 창조자도 없다. 불교는 개인의 영혼을 믿지 않으며, 인간이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졌다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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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식적 복제(the Reproduction Cloning)의 반대로서 치료적 복제(the Therapeutic Cloning)에 관해 고려해 본다면, 불교는 입장을 보류해야 할 것 같다. 인간 생명을 창조하는 생식적 복제는 오직 시험 과정에서만 ‘생명’이 파괴되는데, 치료적 복제에서는, 예를 들면 줄기세포를 채취할 때 ‘비폭력(ahi??)’의 원칙에 저촉되는 것으로 보인다.
--- p.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