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62:
- 아마도 교양이란 '사회적인 분별력'일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반드시 자기 힘으로가 아니어도), 그게 교양이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교양은 근대적인 사회에 주어지는 축복이면서 더욱 근대적인 사회를 지향한다. 말하자면 교양은 그지없는 진보다.
P121:
- 지구에 있기 때문에 지구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이치는 당대와 지식인과의 관계와 닮았다.당대를 올바로 보기란 정말 어렵다.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까이 있기 때문에 더 잘 볼 수 있는 것도 많다. 지식인의 역할이 바로 거기에 있다. 세상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정보만으로 당대 현실을 파악할 때, 혹은 그게 모두라고 단정할 때 그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알리는 일 말이다.
--- p.62,p121
폭주족에 대한 사회의 적의는 지나치다(폭주족은 오토바이를 사용한 범죄조직이 아니다. 폭주족이 경찰에 잡혀 봐야 구류 이틀밖에 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의 범법행위가 적어도 실정법상으로는 매우 경미한 수준임을 방증한다). 그 적의의 실체가 다름아닌 계급적 경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밝고 깨끗하지 않은 모습을 한 모든 것에 대한 중산층의 불안과 혐오이자, 폭주족이 자신의 비천한 신분에 대해 부끄러워하면서 죽어지내길 바라는 사회적 요구를 거부한 데 대한 보복이다. 그 보복은 정기적으로 공공의 적을 선정하여 사회의 진짜 적을 감추는 TV라는 괴물에 의해 발표된다. “쓰레기 같은 자식들이 감히 이 사회를 지탱하는 중산층의 단잠을 깨워.”
--- p.42
오늘 나는 네 이념이 뭐냐는 질문에 '초보 좌파'라 답하곤 한다. 초보라 한정하는 건 내가 좌파가 뭔가를 제대로 안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이유보다는, 아직은 내가 제대로 된 좌파로 살아갈 가망성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좌파로 살아갈 수 있을까. 과연 나는 (글이나 말로가 아니라)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좌파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인가. 자신 없어 하는 내게, 한 어린 후배가 붙여준 새로운 별명이 위안을 준다. B급 좌파. 그래, B급이라도 좌파로 살 수 있다면.
--- p.204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싸움은 절대선인 사람들과 절대악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자기성찰이 가능한 사람들과 자기성찰이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천 년 전 예수가 보여주었듯, 세상을 바꾸는 삶이란 대개 자신을 망가트리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 p.160
서태지 모델을 선택했다는 것은 단지 서태지의 은퇴로 생긴 남성 댄스그룹의 빈자리를 차지한다는 것 외에 몇가지 세부를 갖는다.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건 이른바 사회비판이다. 추측컨대 서태지 모델을 선택한 이수만이 서태지의 중요한 구성용소라 공인된 사회비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닌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수만은 사회비판이라는 요소를 기꺼이 HOT 라는 공산품의 외장재로 채택했다
--- p.182,183
사람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204
비정상적일 만치 현실에 무관심한 90년대 청년들은 '현실과 가장 닮은 가상편실', 영화로 도망했다. 말하자면 90년대 청년들에게 영화는 실종된 현실의 대체물이다. 80년대 청년들이 현실에 정열을 발산했듯 90년대 청년들은 영화 속의 현실에 정열을 발산한다. 현실에 비정상적일 만치 무관심한 그들은 영화 속의 현실엔 더할 나위 없이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그러나 극장을 나서는 순간 그런 개입의 경험은 그들에게서 흔적없이 증발한다. 그들은 다시 신실한 자본의 신도이자 반동의 신도의 삶으로 돌아간다.
--- p.
당대를 파악하는 지식인의 노동은 용접을 하는 용접공의 노동이나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노동처럼 사회적으로 분담된 하나의 역할일 뿐이다. 지식인의 노동이 원래부터 다른 모든 노동보다 존귀한 건 아니다. 인간이 만든 것 가운데 원래부터 존귀한 것은 없다. 사회가 지식인에게 육체노동의 의무를 면해주고 존경과 명예를 준것은 지식인이 원래 존귀해서가 아니라 당대를 파악하는 그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지식인에게 등대의 역할, 이정표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다. 지식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상한 삶과 세상의 존경과 명예가 제가 나면서부터 똑똑하고 잘나서 얻은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들은 '지식인 세계' 를 형성하고 그들끼리만 소통가능한 암호언어(그들이 '지적대화'라고 부르는)로 그들의 허영심을 충족시킨다. 그들은 또한 그 서푼짜리 허영심의 냄새나는 퇴적물을 지성이니 교양이니 인문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몸에 두른채 당대 현실로부터 대중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짓는다.
--- p.123 '썩은 고기' 중
386이라는 경박한 조어(실재한 한 세대를 그런 빈곤한 상상력으로 요약했다는 점에서, 그런 빈곤한 상상력의 조어가 멀쩡한 시사어가 되었다는 점에서, 세기말엔 세상의 미감이 동반 폭락하는 것일까)로 지칭되는, 80년대의 청년들은 80년 광주에 근거했다. 그들이 세상은 고쳐나가기보다는 갈아엎어야 한다는 합의에 이른 건 80년 광주에서 미국의 역할을 알아차리고부터다. 일단의 젊은이들이 부산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른 일은 그 합의의 첫 실천이었다.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내세운 군사 파시즘과 20여 년을 싸워오면서도 미국을 거스르지 않던 한국 청년들의 낭만은 급격하게 혁명의 긴장으로 전이했다.
82학번인 나는 그들의 한 성원이다. 해방 공간이 (박정희 같은 인간마저 잠시 사회주의자였을 만치) 한 군데라도 똘똘한 청년은 모조리 빨갱이로 만든 시대였듯, 80년대는 한 군데라도 진지한 청년은 모조리 빨갱이로 만든 시대였다. 미 제국주의를 만악의 근원으로 보는 종속이론에서 출발한 우리는 마오나 그람시를 거쳐 연어가 강물을 오르듯 사회주의 운동사를 거슬러 올랐다. 80년대 중반이 지날 무렵, 우리 가운데 한 무리는 레닌에 안착했고 다른 한 무리는 김일성에 안착했다. 한 무리는 한국의 80년대를 19세기말의 러시아와 등치 하여 계급 해방을 이루려 했고 다른 한 무리는 남한의 북한화를 통해 조국 해방을 이루려 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우리의 선택은 명백하게 좌편향이었다. 우리의 선택이 가진 이념적 현실적 합리성을 떠나 그 시기가 지난 후 우리가 보인 삶의 궤적을 반추한다면, 우리가 앞으로 보일 삶의 궤적을 추정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90년대 우편향의 바람에 편승해 (우리가 80년대에 내보인 치열함에 비하면) 서글플 만치 졸렬하게 우리의 정신을 청산했다.
80년대를 거대한 가상현실게임으로 만든 그 졸렬한 청산은 대개의 우리 안에서 오늘까지 이어지지만, 그래도 우리의 80년대를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시려온다. 80년대는 연단에 서서 20년 후 수많은 동료들의 정신을 박제로 만들어 금배지와 바꿀 계획을 짜던 놈들이나, 조직생활에 적응 못 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데모만은 개근하려 애를 쓰던 나처럼 하찮은 인간들만 있었던 게 아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청년들이 두번 다시 사적 안락을 찾기 힘들 삶의 지점을 찾아, 죽고 다치고 스러져갔다. 가슴이 시려온다.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그 순수와 정열의 순간을 생각하면 말이다.
이제 마흔에 임박한, 80년대의 한 하찮은 성원인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우리의 선택은 대개의 우리가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던 것 같다.
오늘 나는 네 이념이 뭐냐는 질문에 "초보 좌파"라 답하곤 한다. 초보라 한정하는 건 내가 좌파가 뭔가를 제대로 안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이유보다는, 아직은 내가 제대로 된 좌파로 살아갈 가망성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좌파로 살아갈 수 있을까. 과연 나는 (글이나 말로가 아니라)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좌파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인가. 자신 없어 하는 내게, 한 어린 후배가 붙여준 새로운 별명이 위안을 준다. B급 좌파. 그래, B급이라도 좌파로 살 수 있다면.
--- pp.201-204
"… 그 사람에 대한 제 생각은 간단합니다. 불신감. 이 한 단어로 족할 것 같습니다. (…) 그의 변명은 간단하겠죠. 우리는 너무 조급했다. 내 그릇이 작았다.(항상 개운치 않은 건 그는 항상 '나는 감옥에서 엄청난 도를 깨우치고 더 큰 사람이 되었다'는 분위기를 여기저기서 풍기고 다닌다는 거죠.) 다른 건 모르겠지만 최근의 그의 신작 시를 읽을 때, 저는 예전의 그의 글과 마찬가지로 그 특유의 '가쁜 호흡', 어떤 '집요한 욕망'을 느낍니다. (…) 그가 연예인이 되기로 작정했다면, 좀 덜 짜증나는 연예인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올해 초, 모스크바 유학 중인 옛 사노맹 조직원이 내 글을 읽고 보내 온 편지다. 나는 글에서 박노해(출소 이후의)를 두 번 언급했고 그 글들은 박노해에 대한 분명한 경멸을 담고 있었다. 준법서약서를 쓰고 나오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준법서약서를 거부하고 남기로 한 동료들을 "유연하지 못하다" 하고 진보의 기본을 저버린 자신의 '새로운 진보론'을 강변하기 위해 여전히 진보의 기본만은 놓지 않으려는 옜 동료들을 "낡았다" 하는 인간에 대한 경멸 말이다. 그러나 정작 그 글들이 책이 되어 나오자 나는 도리 없는 불편을 안았다. 어쨌거나 사회적 이유로 오랜 고생을 한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편지는 그런 내 불편을 얼마간 덜어주었다.
생태니 공동체니 일상성이니 서태지니 여기저기서 짜깁기한 박노해의 '새로운 진보론'은 과거의 박노해(혹은 과거의 진보)가 갖는 정치적 강퍅함보다 달콤해 보이고 어떤 사람들에겐 호감을 주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진보론은 조금만 살펴보면 이미 진보의 테두리를 멀찌감치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새로운 진보론엔 정치성이 송두리째 빠져 있다. 이 영리한 전직 혁명가는 '과거의 정치 편향을 철저히 반성'한다는 핑계로 슬그머니 정치성을 빼버린다.(과거의 문제는 정치편향이었는가, 정치성 자체였는가.) 대체 정치성이 빠진, 현실에 대해 정치적 긴장을 일으키지 않는 진보가 이룰 수 있는 미래는 어떤 것인가.
나는 박노해가 다시 고난에 찬 혁명가가 되라는 게 아니다. 우리 중의 누가 그에게 그런 걸 요구할 수 있겠는가. 박노해는 할만큼 했다. 우리는 그의 과거만으로도 그에게 존경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이미 그가 그러고 있듯) 그가 안락하길 바란다. 그러나 박노해가 자신이 선택한 안락이 마치 새로운 진보의 방식인 양, 진보의 미래 비전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댐으로써, 여전히 그에게 호의를 갖는 순진한 사람들을 미혹하고 여전히 진지하게 진보의 갈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는 일은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이다.
거짓 선지자가 된 전직 혁명가는 피할 수 없는 자기 혼돈에 빠지고 그 혼돈은 더욱 깊어만 간다. 출소 직후 넘쳐나는 핸드폰을 개탄하던 그는 이제 자신의 신간 표지를 'TTL 풍'으로 만들어 달라 요구하고(이 경박한 미감), 출소 직후 하루 다섯 시간 노동하며 사는 농촌공동체를 만들겠다 약속하던 그는 이제 "세상을 배우기 위해" 주식투자를 해보겠다 말한다(이 가련한 현실감). 박노해 말마따나 세상은 변했고 진보도 변하건만, 변하지 않은 그 '가쁜 호흡'은 여전히 자신을 시대를 앞서가는 혁명가라 불리고 싶게 하고, 변하지 않은 그 '집요한 욕망'은 여전히 자신을 최고의 상품으로 만들고 싶게 한다.
     추신 : <한겨레>에 실린 박노해의 신간('오늘은 다르게'라는 경쾌한 제목이 붙은) 광고엔 오늘 이 나라를 대표하는 부르주아 지성들의 주례사가 도열했다. 조혜정, 박원순, 유홍준…. 박노해와 그 지성들의 계급 본능(교수나 변호사의 기득권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은 예술처럼 교감한다. 그 지성들에게 박노해는 달콤함(분명한 현재인)에 쌉쌀함(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과거인)까지 곁들인, 달콤 쌉쌀한 초콜릿이다. 그 지성들은 천천히 그 초콜릿을 씹으며 시민계급에 의한 노동계급의 인수합병을 자축한다. 하지만 내 귀엔 벌써 그들의 새로운 대사가 들리는 듯 하다. "무슨 초콜릿이 이리 달기만 해. 싸구려란…."
--- pp.149-152
"… 그 사람에 대한 제 생각은 간단합니다. 불신감. 이 한 단어로 족할 것 같습니다. (…) 그의 변명은 간단하겠죠. 우리는 너무 조급했다. 내 그릇이 작았다.(항상 개운치 않은 건 그는 항상 '나는 감옥에서 엄청난 도를 깨우치고 더 큰 사람이 되었다'는 분위기를 여기저기서 풍기고 다닌다는 거죠.) 다른 건 모르겠지만 최근의 그의 신작 시를 읽을 때, 저는 예전의 그의 글과 마찬가지로 그 특유의 '가쁜 호흡', 어떤 '집요한 욕망'을 느낍니다. (…) 그가 연예인이 되기로 작정했다면, 좀 덜 짜증나는 연예인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올해 초, 모스크바 유학 중인 옛 사노맹 조직원이 내 글을 읽고 보내 온 편지다. 나는 글에서 박노해(출소 이후의)를 두 번 언급했고 그 글들은 박노해에 대한 분명한 경멸을 담고 있었다. 준법서약서를 쓰고 나오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준법서약서를 거부하고 남기로 한 동료들을 "유연하지 못하다" 하고 진보의 기본을 저버린 자신의 '새로운 진보론'을 강변하기 위해 여전히 진보의 기본만은 놓지 않으려는 옜 동료들을 "낡았다" 하는 인간에 대한 경멸 말이다. 그러나 정작 그 글들이 책이 되어 나오자 나는 도리 없는 불편을 안았다. 어쨌거나 사회적 이유로 오랜 고생을 한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편지는 그런 내 불편을 얼마간 덜어주었다.
생태니 공동체니 일상성이니 서태지니 여기저기서 짜깁기한 박노해의 '새로운 진보론'은 과거의 박노해(혹은 과거의 진보)가 갖는 정치적 강퍅함보다 달콤해 보이고 어떤 사람들에겐 호감을 주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진보론은 조금만 살펴보면 이미 진보의 테두리를 멀찌감치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새로운 진보론엔 정치성이 송두리째 빠져 있다. 이 영리한 전직 혁명가는 '과거의 정치 편향을 철저히 반성'한다는 핑계로 슬그머니 정치성을 빼버린다.(과거의 문제는 정치편향이었는가, 정치성 자체였는가.) 대체 정치성이 빠진, 현실에 대해 정치적 긴장을 일으키지 않는 진보가 이룰 수 있는 미래는 어떤 것인가.
나는 박노해가 다시 고난에 찬 혁명가가 되라는 게 아니다. 우리 중의 누가 그에게 그런 걸 요구할 수 있겠는가. 박노해는 할만큼 했다. 우리는 그의 과거만으로도 그에게 존경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이미 그가 그러고 있듯) 그가 안락하길 바란다. 그러나 박노해가 자신이 선택한 안락이 마치 새로운 진보의 방식인 양, 진보의 미래 비전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댐으로써, 여전히 그에게 호의를 갖는 순진한 사람들을 미혹하고 여전히 진지하게 진보의 갈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는 일은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이다.
거짓 선지자가 된 전직 혁명가는 피할 수 없는 자기 혼돈에 빠지고 그 혼돈은 더욱 깊어만 간다. 출소 직후 넘쳐나는 핸드폰을 개탄하던 그는 이제 자신의 신간 표지를 'TTL 풍'으로 만들어 달라 요구하고(이 경박한 미감), 출소 직후 하루 다섯 시간 노동하며 사는 농촌공동체를 만들겠다 약속하던 그는 이제 "세상을 배우기 위해" 주식투자를 해보겠다 말한다(이 가련한 현실감). 박노해 말마따나 세상은 변했고 진보도 변하건만, 변하지 않은 그 '가쁜 호흡'은 여전히 자신을 시대를 앞서가는 혁명가라 불리고 싶게 하고, 변하지 않은 그 '집요한 욕망'은 여전히 자신을 최고의 상품으로 만들고 싶게 한다.
     추신 : <한겨레>에 실린 박노해의 신간('오늘은 다르게'라는 경쾌한 제목이 붙은) 광고엔 오늘 이 나라를 대표하는 부르주아 지성들의 주례사가 도열했다. 조혜정, 박원순, 유홍준…. 박노해와 그 지성들의 계급 본능(교수나 변호사의 기득권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은 예술처럼 교감한다. 그 지성들에게 박노해는 달콤함(분명한 현재인)에 쌉쌀함(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과거인)까지 곁들인, 달콤 쌉쌀한 초콜릿이다. 그 지성들은 천천히 그 초콜릿을 씹으며 시민계급에 의한 노동계급의 인수합병을 자축한다. 하지만 내 귀엔 벌써 그들의 새로운 대사가 들리는 듯 하다. "무슨 초콜릿이 이리 달기만 해. 싸구려란…."
--- pp.149-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