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위풍당당 내게 전화했을 땐 분명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텐데 너는 허깨비처럼 웃기만 하더라. 어둠 사이로 동이 터오기 시작할 때까지 당장이 아니어도 좋을 시시껄렁한 잡담부터 요새 네 머릿속을 동동 떠다니는 고민의 실체들, 소소한 하소연과 그럼에도 살포시 그려보는 오늘보다 멋진 미래의 청사진을 너는 조곤조곤 풀어놓았지.
나는 누군가의 외로움을 듣는 일이 좋아. 그 혹은 그녀와의 감정을 나누는 일이니, 한물간 멜로 영화보다 백배는 의미 있지. 그런 전화는 새벽잠을 깨운대도 괜찮아. 오죽 몸에 한기가 돌았으면 멀쩡한 대낮을 놔두고 하필 밤에 전화했겠니. 망설이다가 버튼을 눌렀을 텐데, 그까짓 잠 설치는 게 대수겠니. --- 〈프롤로그〉 중에서
사람마다 말머리에 다는 입버릇이 있다. 그 가운데 유독 ‘솔직히’, ‘사실은’, ‘실은’, ‘있잖아’로 서두를 시작하는 사람의 얘기는 부담스러워. 그냥 얘기해도 될 것을 굳이 ‘사실’임을 강조하는 바람에 순수한 의미가 사라져버리거든.
별것 아닌 습관 가지고 너무 예민하게 생각한다고? 맞아. 예민했지. 하지만 별것 아닌 것은 아니란다. 습관은 무의식의 결과니까.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대화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싶을 때, 자신의 얘기가 의심받을까 봐 ‘솔직’을 강조하거든. 이러한 습관은 과거에 거짓말로 인해 한두 번의 자괴감과 죄책감을 느낀 사람에게서 나타난다더라. 그리고 나 역시 그렇다고 믿는다. 강조해서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치고 인생이 솔직한 것은 아니더라고.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보다 정직한 사람이 좋다. 나도 의도적으로 ‘솔직’을 강조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서 솔직해야 한다는 강박이 이성을 짓누를 땐 차라리 침묵해버리는 편이다. 당장은 힘들어도 결과적으론 나나 상대방이나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 제로섬(zero sum)만 남으니까. --- 〈솔직함 혹은 정직함의 두 얼굴〉 중에서
워커홀릭은 일종의 도취고 습관이야. 마라톤 선수의 심폐 기능이 한계치에 도달하면 육체의 고통이 사라지고 마약 성분과 같은 신경물질이 뇌에 전달되는데 그것을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부른다지. 그게 지속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격렬한 도취 상태가 일순 사라지면서 심장을 움켜쥐며 땅에 무릎을 꺾고 마는 거야. 인생의 레이스에서 잘 달리는 일은 중요하지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해.
네 나이였을 때 나는 어땠을 것 같니. 꽤 계획적으로 영민하게 보냈을까, 과연?
오후에 바짝 매달리면 끝낼 수 있는 일인데도 밤새 일하는 맛에 신명을 내던 당시의 나는 퇴근 무렵까지 슬렁슬렁 일하다 저녁을 먹고 늘 그렇듯 야근을 하게 됐어. 원래 일 못하는 사람이 야근하고, 밤새우고 그러는 거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으니까. 아무튼 그때 회사 분위기는 젊었고, 젊었기에 상식을 벗어난 면도 있어서, 야근하다 회사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시스템이었지(심지어 침대가 있었다고!). 잔 것 같지도 않은 토막잠을 깨운 건 오전 8시 집으로부터 걸려 온 아버지의 부음 소식이었어. 집에 가려면 갈 수 있었던 그때, 나는 습관적으로 밤을 새는 당시의 일 중독증 때문에 아버지의 임종을 놓쳐버린 몹쓸 딸이 됐단다. --- 〈워커홀릭이 되느니 네 삶을 살아〉 중에서
흔한 말로 ‘사는 게 재미없다’ 싶을 땐 고정적으로 만나는 멤버들이 내겐 있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번 만나줘야 할 때 아냐?”, “너무 안 봤다, 우리”라는 말을 하면 당일로 부킹이 이뤄지고 일상에 찌든 얼굴을 하고 약속 장소에 등장하는데, 이때 우리의 모습은 흡사 한 사발의 피를 얻기 위해 다리를 질질 끌고 벌판으로 향하는 뱀파이어 같아. (중략)
J야, 나는 수다가 좋아. 아까 말했던 섹시한 얘기는 언제든 오케이고, 발전적인 주제도 좋고, 하릴없는 뒷담화도 적당한 범위에선 재밌어. 삶의 언저리에 외로움이 짙어져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면 적극적으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눠라. 주절주절 네 얘기만 털어놓는 고해성사 말고 상대방과 탁구 치듯 얘기하는 재미를 느껴봐. 그런 사람을 늘 주변에 두는 게 좋아. 나중엔 네가 그런 사람이 돼 있을 거야. 아, 그리고 유머 감각은 『유머백과사전』 같은 것을 보면서라도 익혀두는 게 좋아. ‘이 사람과 얘기를 더 하고 싶다, 헤어지기 싫다’라는 기분이 드는 사람이 돼보렴. 웬만한 트로피보다 더 기분 좋아질 거다. --- 〈수다에도 함량이 있는 법〉 중에서
지금까지 네가 겪었고 앞으로 겪어갈 사랑의 통증을 기꺼이 받아들여라. 네가 지금 빠져 있는 사랑을 의심하지 마라. 가장 깊숙한 곳까지 풍덩, 그 사랑에 가급적 온몸을 던져라. 그리고 명치가 아릴 정도로 감정므 쏟아라. 때로 연애, 때로 존경, 때로 짝사랑, 때로 외사랑의 얼굴로 너에게 출현할 그 감정을 이러쿵저러쿵 재단하지 마라.
평생 사랑하며 살아도 모자란 시간이고, 평생 만나도 다 못 만나고 죽을 만큼 매력적인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이다.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그렇게 아까운 시간이라 한들 너는 늙어갈 것이고, 그렇게 남 주기 싫을 만큼 멋진 남자들은 애석하게도 모두 네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남은 답은 뭐겠니. 네 감정과 육신이 허락하는 동안 어울리지 않는 신세한탄과 저울질의 바보짓을 거두고 가장 사랑하기 좋은 상태로 네 자신을 두는 일이겠지. --- 〈지나보니 사랑인 줄 알겠더라〉 중에서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아온 습관성 냉가슴앓이 환자들에겐 그런 산이 하나씩 필요해. 사람이면 더 좋겠지. 네 손을 잡아줄 온기가 있으니까. 다음에 연애할 땐 산 같은 사람을 만나렴. 한눈에 쨍 하니 눈에 들어오는 매력은 적을지 몰라도 만날수록 야금야금 알아가는 재미가 있어. 그리고 그 재미는 평생 너를 웃게 해주고 안온하게 감싸줄 거야. 산은 먼저 움직이는 법이 없고, 자기를 알아보고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에게만 충성을 다한다는 맹점이 있으니까 안목을 키우는 연습은 필수야.
그게 산이건 바다건, 남자건 일이건 괜히 주변만 빙빙 도는 건 바보짓이야. 적어도 나처럼 요상한 자기애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시간 낭비는 하지 마라. 세상 누구도 너 자신보다 소중한 사람은 없어. 목표가 생기면 주저하지 마. 정면으로 마주 섰을 때 비로소 네 미래도 너에게 찬란한 속살을 보여줄 거야.
--- 〈세상 누구도 너 자신보다 소중한 사람은 없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