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본관 경주, 음력 10월 30일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섭리 1798번지에서 아버지 김기범金基範과 어머니 김준金俊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서는 이곳에서 10대의 중반까지 살다가 오산학교에 진학하면서 거주지를 옮겼다고 전하지만 그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본명은 희권熙權인데 후에 ‘억億’으로 개명, 아호는 안서岸曙.
1904년
동향인 박진사댁으로 불리던 양가집 규수인 16세 박씨와 결혼하다.
1907년
한문을 배우다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투를 자르고 오산학교에 입학. 오산학교는 민족운동의 열기에 가득한 곳이었는데 김억은 이때부터 문학을 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1913년
오산학교 졸업. 집안이 넉넉한 살림이어서 동경 유학을 결심하고 준비를 한 듯 보인다.
1914년
일본 동경에 있는 게이오후대학(慶應大學) 문과에 입학, 2월 《학지광》 창간호에 창작시 발표, 이것이 활자화된 작품으로는 최초의 것이다.
1915년
《학지광》 5월호에 시 〈야반〉〈나의 적은 새야〉〈밤과 나〉 등을 발표. 이때부터 이광수, 주요한, 김여제 등의 동경유학생 문사와 교의를 가졌다.
1916년
부친의 사망으로 게이오후를 중퇴, 고향으로 돌아와 오산학교 교사로 취임. 이때 영변의 숭덕학교에 잠시 머물러 있었다고 하나 자세한 것은 밝혀져 있지 않다. 6세 연하인 김소월과 사제지간의 연을 맺은 것도 이때이다.
1918년
《태서문예신보》 창간과 함께 베를렌느를 비롯한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러시아 문학작품을 본격적으로 번역 소개하는 한편 창작시 발표. 이 무렵부터 문단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1919년
《태서문예신보》에 창작시 발표.
1920년
석주명 등과 함게 서울에서 에스페란토 학회를 발기하고 주재. 황석우, 남궁벽 등과 함께 동인을 결성하여 《폐허》를 창간하고 창작시를 발표했으며 중심 멤버로 활약. 이어 김동인, 주요한이 관계한 《창조》에 참여하여 김소월을 소개했다. 이 인연은 뒤에 창조파가 발간한 《영대靈臺》에 이어졌다.
1921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집이며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간행. 문단 안팎의 주목을 크게 받았다.
1922년
천도교에서 발행한 종합지 《개벽》이 창간되다. 김억은 그의 문예란을 담당하여 활발하게 창작시 발표.
1923년
4월, 타고르 원작 《기탄자리》를 이문관에서 출간. 6월 우리나라 근대시집으로서 최초의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와 《오뇌의 무도》 개정판을 조선도서에서 간행.
1924년
가을, 《동아일보》 문예부장이었던 유광열의 후임으로 취임. 8월 타고르의 《신월新月》《원정》을 출판, 또한 아더 시몬즈의 《잃어진 진주》를 문우당에서 내어 문단의 화제를 모았다.
1925년
3월, 시집 《금모래》를 조선문단사에서 발간, 9월 시집 《봄의 노래》를 매문사에서 발간, 새로 창간된 《가면》의 발간에 참여 그것을 주재함. 이때 소월의 작품을 많이 실었으나 지금 이 잡지가 전하지 않아 자세한 작품목록은 알 수 없다.
1927년
3월, 1923년 출간했던 타고르의 《기탄자리》를 개제한 《고통의 속박》을 동양대학당에서 간행.
1929년
차남 상칠尙七 고향인 정주에서 태어나다. 4월 시집 《안서시집》을 한성도서에서 출간.
1930년
《매일신보》의 문예란을 담당, 중앙방송국에 취임. 중앙방송국은 8?5직전까지 근무하여 생활의 근거가 되었다.
1933년
《모범서한문模範書漢文》을 한성도서에서 간행.
1934년
9월, 역시집 《망우초》를 한성도서에서 간행.
1936년
1월, 서울 종로구 계동 54번지에서 상숙尙淑 출생, 부인 박씨 사망.
1937년
5월, 차녀 상주尙珠 출생.
1939년
12월, 김소월 사후 그의 유작을 정리한 《소월시초》를 박문서관에서 출간. 이때 최고 상태의 소월시 몇 편이 김억의 손질로 시집에 수록되었다.
1941년
7월, 시집 《안서시초》가 박문서관에서 간행.
1943년
《동심초同心草》을 조선출판사에서 간행.
1944년
봄, 신인순申仁順과 재혼, 4월 조선여류 한시선집으로 《꽃다발》을 박문도서에서 간행, 8월 《지나명시선支那名詩選》 2권을 한성도서에서 출간, 12월 시집 《야광주夜光珠》를 조선출판사에서 간행.
1946년
중앙방송국 부국장직에서 퇴임, 도서출판 수선사首善社의 편집 주간으로 취임, 여기서 백철의 《조선신문학사조사朝鮮新文學思潮史》, 고정옥高晶玉의 《조선민요연구朝鮮民謠硏究》등 양서가 발간되었다. 또한 6?5전쟁 때까지 육군사관학교와 공군사관학교 강사, 한편 서울여상고에도 출강, 8월 3녀 상란尙蘭 출생.
1947년
2월, 시집 《먼동이 틀 제》를 백민문화사에서 출간, 4월 여류 한시를 번역한 역시집 《금잔디》를 동방문화사에서 출간.
1948년
1월, 김소월의 작품집 《소월민요집》을 산호장에서 출간, 2월 시집 《민요시집》을 한성도서에서 출간. 《민요시집》은 김억이 중기 이후부터 쓴 서정민요시들을 모은 것으로 이 시인을 대표하는 창작시집이다.
1949년
3월, 번역시집 《옥잠화玉簪花》를 이우사에서 출간.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서울 종로구 계동 54번지 자택에 있다가 9·28 수복 직전 북쪽 기관원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 후 조국평화통일 위원으로 이름이 나타났다. 지금 현재는 생사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