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상상해보면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저기가 어디였더라? 그래, 바로 다시 거기다. 우리 집 앞 골목길이다. 어느 날, 데미안이 그곳에 서 있는 걸 보았다. 그는 손에 노트를 들고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우리 집 현관문 위에 달려 있는, 새가 새겨진 낡은 문장이었다. 나는 창가 커튼 뒤에 숨어 그를 지켜보았다. 낡은 문장을 바라보는 세심하고 차갑고 밝은 얼굴을 깊이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어른의 얼굴이었으며 학자나 예술가의 얼굴이었다. 무언가를 통찰하고 있는 눈빛, 탁월하면서도 어떤 의지가 느껴지는, 이상할 정도로 빛이 나면서도 냉담한 얼굴이었다. [p80]
나는 데미안의 얼굴을 보았다. 소년의 얼굴이 아니라 어른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아니, 어른 남자의 얼굴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았다.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였던 것 같다. 여성의 얼굴도 얼핏 보였고, 어떤 순간에는 여성도 남성도, 어린이도, 늙거나 젊은 것도 아니고, 천 살쯤 먹은 것만 같은 시간조차 뛰어넘은 어떤 존재, 그러니까 우리와는 다른 시공간의 직인이 찍혀 있는 존재가 보였다. 동물이나 나무, 별들이 그렇게 보일 수 있으리라. 당시에는 그런 걸 몰랐고, 지금 어른이 되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을 정확히 느꼈다기보다 그와 비슷하게 느꼈을 뿐이다. 어쩌면 그는 아름다웠고, 어쩌면 그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거부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었는지 판단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한 마리 동물이나 유령 또는 한 폭의 그림 같았고, 그가 어떤 모습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우리와 아주 달랐다는 점뿐이다. 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와는 달라 보였다. [p83]
나는 난생처음 내 깊은 비밀을 밖으로 꺼내놓았다. 어린 시절부터 품어온 ‘두 세계’에 대한 생각을 나의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는 가장 깊은 느낌으로, 내가 그의 의견에 동의할 뿐 아니라 그가 옳다고 인정한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이용하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면서 내 말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주의 깊게 들어주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에서 다시금 그 동물과도 같은, 신비하고도 시간을 넘어선 무언가, 나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p99]
나는 그의 얼굴을, 창백하고 돌덩이 같은 가면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래, 저게 바로 데미안이었다. 그전의 모습, 나와 함께 걷고 이야기할 때의 데미안은 절반뿐이었다. 가끔씩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좋은 마음에서 사회적인 관습을 따르던 모습은 그의 절반이었다. 진짜 데미안은 지금 저 모습이었다. 돌로 만든 듯, 태고의 모습과 동물의 모습을 간직한, 아름답고도 차갑고, 죽어 있는 동시에 들어본 적 없는 생명으로 은밀하게 가득 찬 모습 말이다. 그를 둘러싼 이 고요한 공허와 천상의 정기, 별의 공간 그리고 이 고독한 죽음!
이제 그가 자기 안으로 완전히 들어갔음을 느끼고 전율했다. 나는 저토록 고독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저 세계를 그와 나눌 수 없었고, 그가 마치 닿을 수 없는 사람 같았다. 마치 닿을 수 없는 사람 같았다. 마치 이 세상의 가장 먼 섬에 있는 듯 내게서 멀게 느껴졌다. [p105]
나는 언제나 나 자신에게 열중해 있었고, 또 언제나 나 자신을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조각 삶을 살아봤으면, 내 안에서 무언가를 세상으로 내보냈으면, 세상과 관계를 맺고 투쟁도 해봤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이따금 저녁에 거리를 걸으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한밤중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때면 나는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이제는, 정말 이제는 내 연인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녀가 다음 모퉁이를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다음 창문에서 내 이름을 부를 거라고. 이따금은 이 모든 게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나는 언젠가 자살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p154]
마치 꿈속에서 시간이 흘러가듯 의식도 없이 며칠이 흘러 그림이 완성되던 날 저녁, 내 방 벽에 그림을 걸어놓은 뒤 그 앞에 스탠드를 갖다 놓고, 마치 결판이 날 때까지 맞서 싸워야 할 천사와 마주하듯 그림 앞에 정면으로 섰다. 그 얼굴은 이전에 그렸던 그림과 닮아 있었고, 친구 데미안과 닮아 있었고, 몇몇 부분은 나 자신과도 닮아 있었다. 한쪽 눈이 다른 쪽보다 훨씬 위에 있었고, 어떤 운명이 가득 담긴 듯한 눈빛은 나를 넘어 어딘가를 골똘히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 얼굴 앞에 섰을 때, 내적인 긴장으로 가슴속까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모습에 질문하고, 비난하고, 쓰다듬고, 그 앞에서 기도했다. 그 모습을 어머니, 애인, 창녀라고, 거리의 여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아브락사스라고 불렀다. [p188]
그리고 어떤 깨달음이 예리한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건 바로 우리 각자에게는 ‘직분’이 주어지지만 그것을 자신이 직접 고르거나 용도를 바꾸거나 멋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새로운 신을 원하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세계에 어떤 새로운 걸 내놓으려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다! 진실을 깨달은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은 바로 자기 자신을 찾는 길이다. 그리하여 자기 안에서 확고해지고, 그 길이 자신을 어디로 인도하든 자신만의 길을 계속 더듬어나가야 한다. 그것만이 그에게 주어진 한 가지, 오직 한 가지, 유일무이한 의무인 것이다. 이 깨달음은 나를 깊이 뒤흔들었다. [p203]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진정한 임무는 단 하나, 오직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결국 작가나 광인이나 예언자나 범죄자가 되어 있더라도, 이것은 그 자신의 문제가 아니며 그리 중요한 사실도 아니다. 중요한 건 자신이 원하는 운명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어 내적으로 충실하고 완벽하게, 끊임없이 자신의 운명을 사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모든 것은 반쪽이며,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이며, 대중이 가진 이상으로의 도피이며, 그저 누군가에 맞추는 것이며, 자기 내면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다. 내 앞에 두렵고도 새로운 형상이 떠올랐다. 이미 수없이 예감하고 어쩌면 자주 내 입으로 말해왔던 것이지만 이제야 체험하고 만 것이다. 자연은 나를 이 세상에 내던졌다. 나는 불확실함을 향해, 어쩌면 이 세상을 새롭게 하라고, 어쩌면 단지 아무것도 아닌 것을 향해 내던져진 존재였다. 그리고 태곳적 심연으로부터의 이러한 내던져짐이 그 뜻을 완전히 이루도록 내 안에서 그 의지를 느끼고, 또 그것을 완전한 내 의지로 삼는 것, 그것만이 나의 소명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p204]
그녀의 목소리는 깊고 따스했으며, 나는 달콤한 포도주처럼 그 목소리를 마셨다. 그리고 눈을 들어 그녀의 고요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그 눈을, 신선하게 무르익은 입술을, 그리고 ‘표’가 찍혀 있는 당당하고 환하게 트인 이마를.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모르실 겁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며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평생 동안 헤매기만 하다가 이제야 집에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녀가 어머니처럼 미소 지었다.
“누구라도 집으로 돌아오기란 불가능하죠.” 그녀가 상냥하게 말했다. “하지만 친밀한 길들이 서로 마주치는 곳에서는 온 세상이 잠시 고향처럼 보이는 법이에요.” [p224]
우리는 자주 생각하고 대화함으로써 세상의 한가운데 살았는데, 다만 다른 영역에서 살았을 뿐이다.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어떤 경계로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으로 나뉘어 있었다. 우리의 과제는 세상에 하나의 섬을 보여주는 것, 어쩌면 하나의 모범이자 적어도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고독한 사람이었던 나는, 완전한 외톨이를 맛본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제 다시는 행복한 사람들의 잔칫상으로, 즐거운 사람들의 축제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지 않았다. 이제 다시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끼리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아도 질투와 향수가 밀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표’를 지닌 사람들의 비밀을 전수받았다. [p231]
이따금 내 삶의 평온함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혼자 지내면서 체념을 연습하고, 힘들게 몸부림치며 고통과 싸우던 일에 오래 익숙해져 있었기에 H시에서의 몇 달은 마치 꿈속의 섬처럼 느껴졌다. 아름다움과 평안함과 감정들로 둘러싸여 살 수 있는 섬. 이런 게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던 새롭고 더 높은 곳을 지향하는 공동체의 전주곡임을 예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행복을 넘어선 깊은 슬픔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런 행복이 계속될 수 없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풍요로움과 안락함 속에서 숨 쉬는 걸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고통과 분주함이 필요했다. 또 언젠가는 이 아름다운 사랑의 형상에서 깨어나 다른 사람들의 차가운 세계에서 다시 홀로, 완전히 혼자 서게 되리라는 걸 짐작했다. 오로지 고독과 싸움만 있고, 누군가와 함께 사는 일도, 평화도 없는 그런 세계에서. [p252]
목적지에 도착했다. 밤이었고, 내 의식은 완전히 깨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안의 이끌림과 열망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어떤 홀의 바닥에 깔린 매트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부름을 받은 그곳에 이르렀음을 느꼈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내 매트 바로 옆에 또 다른 매트가 있었다. 그 위에 누군가가 누워서 내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이마에 표를 지니고 있었다.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도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거나, 그저 침묵했다. 그는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머리 위쪽 벽에 매달린 등불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가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