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와의 결혼생활은 항상 허기졌고 그리웠다. 그래도 디에고의 아내가 된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디에고가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맺어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사실 디에고는 그 어떤 여자의 남편도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디에고가 만나는 여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낯선 타인이었다. 계속 그 여자들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 채 타인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 내가 가장 좋아했고 나와 모든 것을 함께했던 나의 여동생. 크리스티나는 내 사랑까지 함께하고 싶었던가 보다.
디에고의 오랜 버릇이었다, 연인의 자매나 친구와 바람을 피우는 것은. 버릇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너무나 자주, 너무나 많이 일어났던 일이었으니까.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의 모든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그의 성향을. 이해하려 애썼다, 사랑하는 이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그의 잔인한 성격을.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이해하려 노력한다고 해서, 상처의 쓰라림이 덜어지지는 않았다. 디에고를 위해 길렀던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다. 하지만 디에고를 향한 사랑은 잘라낼 수 없었다.
디에고는 한 여름의 폭설이었다.
황당하고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이 흠뻑 젖어 떨고 있어야 하는.
난 그저 쏟아지는 눈을 맞고 서 있었다.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 눈보라를 사랑했으니까.---pp.18~20
그러나 우리는 사랑이란 감정이 ‘이성’을 잃게 하고 ‘감각’마저 마비해 모든 생명체가 지닌 ‘생존본능’조차 포기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란 걸 알고 있다. 그 완전하게 순수한 ‘절대성’이 곧 사랑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사랑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혹독하리만큼 순결한 사랑이었다.
지금 사랑 때문에 고통스럽고 그 애절한 희망고문에 애태우고 있는가? 헤어져야만 하는 수많은 이유에도 차마 그 사랑을 외면하지 못하고 있는가? 괜찮다. 어차피 또 다른 사랑을 찾는다 해도 그 사랑 역시 고통일 테니…….
사랑은 누구에게나 고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힘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조금만 더 그 사랑에 미쳐라! 그 고통조차 느낄 수 없도록…….---p.35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는 지금 그가 나에게 저지른 모든 과오를 무조건 받아들인다. 먼저 박열의 동료들에게 말해두고자 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우리를 비웃어달라고. 이것은 우리 두 사람의 일이다. 다음으로 재판관들에게 말해두고자 한다. 모든 것은 권력이 만들어낸 허위이고 가식이다.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 위에 세워 달라! 나는 박열과 함께 죽을 것이다. 박열과 함께라면 죽음도 오히려 만족스럽게 여길 수 있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 위에 세워 달라!
나는 박열과 함께 죽을 것이다.
박열은 선언서로 최후진술을 대신했다. 재판장이 기립을 명령했다. 우린 일어서지 않았다. 재판장이 큰 목소리로 선고했다.
사형!
난 곧바로 일어서서 두 손을 번쩍 들며 만세를 외쳤다. 박열도 “재판은 비열한 연극이다”라고 소리쳤다. 우린 사형 선고 따위에 흔들리지 않았다. 우린 끝까지 당당했다.
퇴정하는 판사를 향해 박열이 덧붙여 말했다.
“재판장, 자네도 수고 많았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pp.58~60
당신이 청혼했을 때 저는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처럼 부부관계를 가지지 않겠다,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달라. 당신이 동의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요구를 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남자는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이상한 조건의 결혼생활에 당신은 아무런 질문 없이 동의해주었지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성욕을 버리고, 남들이 우러러보는 사회적 지위를 팽개치고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레너드, 당신 이외엔 없을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을 싫어하던 제가 유대인과,
성관계를 혐오하던 제가 남자와
레너드 당신과 결혼하게 되었지요.
제 처녀 때의 이름 버지니아 스티븐이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을 저는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가족이었고, 친구였고, 동료였습니다. 제 매니저이면서 개인주치의였습니다. 매일 제 생리주기와 몸무게까지 기록했으니까요. ---p.81
그녀에게 사랑은 언제나 전쟁이었다.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에 상처입고,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견디면서도, 법이나 관습 같은 규칙도 없이, 모든 걸 걸고 싸워 이겨야 하슴……. 어쩌면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은 이런 사나운 전쟁의 그늘일지도 모른다. 승리한 자가 비로소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으니. 우리도 그렇게 사랑해야 했다. 사랑은 그녀처럼 전쟁을 치르듯 해야 했다. 이런저런 계산을 하며 주저하지 말고, 자존심을 내세우며 망설이지 말고, 사람들의 시선에 움츠러들지 말고, 가족의 반대에 갈등하지 말고, 법이나 관습 때문에 포기하지 말고 사랑을 쟁취해야 했다. 아마 그랬다면 과거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대신 현재의 사랑에 행복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지근했던 지난 사랑에 후회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정열적이지 못했던 이유는 그럴 만큼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였으니. 죽음이 아니라면 어떤 이유로도 이별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저 사랑이 모자랐다는 이유 외에 이별의 다른 이유는 없다. 이제 후회가 아닌 더 뜨거운 사랑이 찾아오기를 기도하자.
오노 요코를 보라. 그녀는 세계의 연인이었던 스타와 결혼하는 사랑의 기적을 일으켰다. 그녀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아마도 어쩌면 사랑을 위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도 지치지 말고 사랑을 위해 전쟁을 하자.
---pp.124~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