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1
기도는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의식입니다. 기도는 나약한 인간이 절대적 존재에게 자신이 바라는 바를 말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기도의 내용과 방법은 각 종파마다 다른 양태를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특성에 따라 기도의 구체적인 모습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이야기의 내용과 말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결국 기도는 기도자가 섬기는 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기도문’, 즉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만큼 하나님을 잘 아는 분이 없기에, 예수님만큼 기도에 대하여 올바르고 정확하게 가르쳐주실 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활용하게 되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파악하게 되고, 그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도 알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주기도문’은 우리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됩니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태복음 6:9)로 시작됩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가르치셨고 우리를 ‘하늘나라의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늘’은 어떤 것일까요?
초월과 존경의 자리
인간에게 하늘은 매우 친숙한 대상이면서 동시에 매우 낯선 대상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하늘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거의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로 사는 공간이 바로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의 조종사나 드넓은 우주를 탐험하는 우주인이라 할지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도 우리는 잠시 하늘에 떠있을 뿐, 여전히 우리의 기본 주거 공간은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볼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은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보다도 더 낯선 대상입니다. 즉, 우리가 살펴볼 하늘은 단순히 우리 머리 위로 펼쳐진 광활한 창공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을 특정 공간, 즉 해, 달, 그리고 별들이 반짝이는 높은 하늘로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어디에나 계신다’라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앙고백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인간이 하늘에 대하여 가졌던 생각은 매우 비슷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땅과는 ‘수준 또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곳’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현대 과학 문명 이전의 사람들은 신, 천사, 요정 같은 영적인 존재들은 하늘에 산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해, 달, 별들조차 신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현대 과학 문명이 전통적인 신화들을 대부분 깨뜨렸지만 현대인들은 여전히 하늘은 이 땅과는 ‘차원’이 다른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외계 생명체들에 대한 논란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현대인들은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 문명을 가진 외계인들이 UFO미확인비행물체를 타고 우주 또는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생각합니다. (pp. 13~17)
10.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굳이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때때로 우리는 자신에게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은 인생의 방향과 목표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을 발견하기도 하고, 심각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방향과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죽도록 노력해도 좀처럼 보람과 성취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도로 위의 자동차들이 똑같이 과속을 한다고 해도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대형 사고가 난 현장으로 달려가는 긴급 구조 차량이나 달아나는 범인을 쫓아가는 경찰차가 과속했다고 해서 그 차량 운전자들을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일반 차량들은 그 긴급차량들을 위해 길을 열어줄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난폭 운전을 하며 도로를 마구 휘젓는 도로의 무법자들의 끝은 엄중한 법의 심판이며 심지어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즉, 그 열매는 수치와 불명예일 뿐 아무런 긍정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많은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누린다 한들 분명한 방향과 목표도 없이 무작정 인생길을 달린 사람에게는 결국 ‘내가 무엇 하려고 이처럼 고달프게 살았나’하는 후회와 허무감만 남습니다.
마태복음 6장 13절 말씀은 좁게는 우리가 ‘주기도문’을 드리는 이유를, 넓게는 우리가 현재 이 세상에서 사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부분입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 삶의 방향과 목표일까요?
당신의 승리는 이미 정해졌다
마태복음 6장 13절 말씀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진정한 왕이며 주인이시고, 온 세상 만물로부터 최고의 칭찬과 존경을 받으실 분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 기도는 이 세상의 중심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우리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액세서리, 유일한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빛내기 위해 존재하는 무명의 엑스트라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주기도문’을 통하여 그 존귀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우리는 울어도 같이 울고, 웃어도 같이 웃는, 모든 기쁨과 아픔, 영광과 고통을 함께 경험하는 한 가족, 한 운명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우리의 목표가 다를 수가 없고 그 목표가 이루어졌을 때에 얻게 될 영광과 기쁨이 다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추진하시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이익과 기쁨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꿈꾸고 이루고자 하시는 모든 일들은 우리 모두의 행복과 기쁨을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기쁨이나 영광과 별개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 우리의 계획과 열매들이 우리의 기쁨과 영예만을 위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맛보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목표와 우리의 목표를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꿈을 품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만이 삶의 진정한 의미와 보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pp. 189~194)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