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론이라는 말은 죽음의 악취를 풍긴다. 이것은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밑바닥이다. 인간이 정말 운명론에 빠지게 되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하고 절대적인 가난, 즉 가난의 종착지이다. 인간은 무턱대고 쉽사리 운명론이라는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그것은 하룻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도둑처럼 여러 해에 걸쳐, 심지어는 여러 세대에 걸쳐 개인의 정신을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온다.
미국과 여타의 기회의 나라에 사는 우리는 이점을 이해하기 힘들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제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는 걸까?’ 우리는 냉정하게 말한다. ‘그는 신발끈을 조이고 바닥에서 일어나 걸어야 해.’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 놓인 다리의 양끝에서 모두 살아본 나는 자기가 그러고 싶어서, 혹은 용기나 의지가 부족해서 절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드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다. 그것은 삶의 가혹한 현실에 의한 논리적 귀결이다.
우리 입장에서 격려의 말을 하기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중 누구라도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의 생득적 권리, 할 수 있다는 정신, 우리가 받은 교육, 재물 ? 건강 ? 정의를 빼앗긴다면 우리도 금방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해야 할 일을 나는 할 수 없어. 내가 가져야 할 것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아. 그리고 그건 모두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것들이야.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이것이 가난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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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이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결국에는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아이들에게 우리 어른들은 신뢰를 보내주어야 한다. 그러면 오늘 잉태된 아이들의 꿈이 내일의 현실 세계에서 실현될 것이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날은 반드시 온다. 아이들의 코를 닦아주고 숙제를 도와주는 지금 그런 날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그러나 지금 바쁜 시간에 당신의 무릎에 앉겠다고 때 쓰는 어린 딸이 당신의 안녕을 책임지는 날이 올 것이다. 잠들기 전에 물을 한 잔 더 마시겠다고 칭얼대는 어린 아들이 당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언젠가 당신이 그들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할 때, 그 활기찬 꼬마들은 빡빡한 스케줄과 비서를 거느린 권력의 대열에 서 있는 성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바로 아무 힘도, 주장할 목소리도 없는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라는 사실을.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어린아이들의 영혼과 인성과 가치관을 형성시켜 주고, 그들이 구름 위에 성을 짓는 것을 도와주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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