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는 취미가 생기면서 오빠는 처음으로 아빠와 달라졌다. 아빠는 으샤으샤 열성적인, 늘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진을 찍는 일이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거리를 두고, 둘러보는 일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오빠는 처음으로 가만히 멈추어 섰다. 처음 카메라를 손에 쥐기 전까지, 오빠는 언제 어디서든 아빠와 발걸음을 나란히 맞추었다. 집에 있으면 둘이 함께 미식축구를 하거나, 아빠의 구역인 뒷마당에서 아빠와 나란히 땅을 파고 물을 주고 씨를 뿌리고 장미 넝쿨에 살충제를 뿌렸다. 피엑스나 영내 식료품점에 가면 둘이서 목록에 적힌 물건을 누가 더 많이, 빨리 찾아오나 경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카메라를 잡고부터 오빠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오빠 사진에 모두들 입을 모아 감탄을 하는데도 아빠가 별말이 없었던 것은.
오빠가 찍은 사진은 정말 멋졌다. 사진을 잘 볼 줄 모르는 나도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늘 하던 이 말의 의미도.
“티제이 눈엔 이런 게 보이는구나.”
오빠가 어느 옛 도시를 둘러싼 오래된 돌벽을 찍은 사진을 보면, 그 벽을 내 눈으로 직접 볼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울퉁불퉁한 돌들에 진 그늘 모양이나 땅바닥 가까이에 누가 해 놓은 작은 낙서 같은 것들이.
--- p.58~59
하지만 아빠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인생을 직접 발로 뛰며 사는 사람이 있고, 구경만 하는 사람이 있는 거야.”
조각상이나, 길 가운데를 뒤뚱뒤뚱 걸어가는 오리나, 방금 무릎에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린 어린아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오빠와 맞추느라 관광 속도가 느려질 때마다 아빠가 하는 이야기였다.
“네가 구경만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길은 비켜 줘야지. 우리처럼 몸소 움직이는 사람들이 치고 나갈 거거든.”
“당신이 사진 찍는 취미 없다고 티제이를 그렇게 들볶는 법이 어디 있어요?”
엄마가 이렇게 나무라면 늘 웃어 버리고 마는 아빠였지만 그래도 다 티가 났다. 카메라를 든 오빠 모습이 아빠에겐 여전히 거슬린다는 게.
--- p.59~60
“오빠 눈엔 달이 그렇게 재미있어?”
오빠가 입대를 한 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 날 오후, 나와 함께 부엌에 앉아 있던 오빠에게 물어보았다. 탁자 위에는 오빠가 최근에 찍은 사진들이 쫙 펼쳐져 있었다. 그중에는 흐릿하고 둥근 덩어리처럼 나온 달도 있었고, 10센트 동전처럼 얇고 테두리가 뚜렷해 보이는 달도 있었다.
“오빠가 혜성을 찍는다면 진짜 볼만할 것 같아. 운석 떨어지는 광경도 되게 멋질 것 같고. 근데 달은 밤새 그냥 가만히만 있잖아.”
그러자 오빠가 말했다.
“달에는 그림자가 있어. 운석 구덩이 때문에 지는 그림잔데 그게 재미있어. 그리고 달 표면에 인간이 찍어 놓은 발자국이 있다는 게 좋아. 뭔가 굉장히 멋지단 느낌이 들어. 그리고 글쎄, 그냥, 달은 우주에서 실제로 사람이 가 본 곳이잖아. 상상이 돼? 우주 속을 날아서 달에 가는 느낌이란 게 어떨지 말이야.”
--- p.60~61
사진 인화가 참 재미있는 게,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아주 작은 부분에 매달린다. 예를 들면 손가락 윤곽 하나하나가 최대한 섬세하게 나오도록 애를 쓴다든지. 아니면 얼굴에 진 그늘 모양이 선명히 보이게 한다든지.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출 때처럼, 각각의 작은 부분들을 잘 뽑아낼수록 사진 전체가 담는 이야기가 더욱 생생해진다.
--- p.86
“티제이 거기서 여자 친구 생겼을까?”
“내가 어떻게 알아. 필름밖에 받는 게 없는데. 오빤 나한테 편지 안 써.”
홀리스터 일병은 잠시 오빠의 사진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근데 나는 말이야, 이 사진들이 전부 티제이가 너한테 보내는 편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 티제이가 부모님한테는 편지 보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보내긴 하는데 별 내용은 없어. 음식이 어떻고 벌레가 어떻고, 뭐 그런 얘기뿐이야.”
“거 봐, 티제이가 너한테만 진짜를 보내고 있는 거라니까. 너 티제이 사진 중에 부모님께 안 보여 드리고 숨기는 사진 있지, 안 그래? 분명 너만 보는 사진이 있을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냐면, 부모님이 사진 전부 다 보시는 거 티제이가 원치 않으니까. 부모님도 다 보시길 바랐으면 왜 굳이 너한테 따로 보냈겠어? 그냥 어머니께 현상소에 맡겨 달라고 부탁하면 되는데. 현상료가 비싼 것도 아니잖아.”
--- p.111~112
그날 밤, 나는 침대 위에 오빠의 사진들을 펼쳤다. 휠체어에 앉은 군인의 사진이 보였다. 오른쪽 다리가 잘린 그 군인. 다리의 절단되고 남은 부위가 붕대를 둘둘 감은 채 똑바로 카메라 쪽을 향해 있었다. 겁에 질린 어린아이. 윗옷은 입지 않고 두 손으로 귀를 막고 길을 달려오고 있었고 멀리 뒤편에는 헬리콥터가 떠 있었다. 들것에 실려 가는 그 병사의 사진. 가슴에 두른 붕대에 흥건히 젖은 피가 보였다. 어느 군인의 얼굴. 퀭한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의 두 뺨과 이마가 화상과 상처로 덮여 있었다.
나는 이 사진들을 모두 아빠의 책상 위에 마치 카드처럼 펼쳐 놓았다. 내일 아침, 아빠가 커피를 마시려고 책상에 앉았을 때 볼 수 있도록.
--- p.153~154
이 책은 꿈꾸는 순간들에 대해 떠올리게도 했지만, 품었던 꿈이 사라지는 순간, 오래된 믿음이 변하는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믿어 온 생각과 스스로의 감정이 충돌하는 순간들.
눈에 보이는 사건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 변화들이 더욱 역동적이었던, 번역하는 동안 행복하고 가슴 뛰었던 이 이야기가 독자 여러분들께 저마다 즐거운 경험이 되기를 무엇보다 바란다.
--- p.189~190, 옮긴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