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최대의 화두, 로봇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로봇의 서사적 역할에 대한 해석의 요구도 뒤따르고 있다. 흔히 SF 장르로 일컬어지는 서사물에서 주로 등장하는 로봇은 단지 서사적 기능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로봇에 대한 상상의 영역을 넓혀 주어 현실 세계의 기술적 영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실제로 어렸을 적 아톰을 보고 자란 일본의 많은 로봇공학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목표는 아톰과 같은 2족보행 로봇을 만드는 것이었으며, 지난 2000년 첫 선을 보인 혼다의 아시모는 그러한 꿈이 일본에서 최초로 실현되었다는 증거가 되었다. (3-4쪽)
로봇 소재 애니메이션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등장한 것이 바로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퍼스트 건담’이라 불리는 「기동전사 건담」이다. 복잡한 세계관과 과학적 근거가 반영된 각종 설정들, 정치적인 갈등과 전쟁으로부터 빚어지는 소재, ‘뉴타입’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기존의 거대로봇 애니메이션과는 차별화되는 점이었고 다양한 연령층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어 흥행에 성공한다. 이후 건담시리즈는 리얼 로봇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시대를 열었으며 ‘건담’이라는 타이틀을 앞세운 후속 작품의 연속 제작으로 현재까지도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16쪽)
이 작품(「공각기동대」)은 다른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철저히 성인층을 타깃으로 하는 현실주의 작품이다. 일반인에게는 인터넷의 개념조차 생소했던 당시의 작품으로서는 놀랍기까지 한 정보화 이후 미래 사회에 대한 예측, 그에 걸맞은 심오하고 철학적인 주제로 다른 애니메이션과 확실한 차별화를 가져온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탄탄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수사물로서의 서스펜스에도 상당히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덧붙여 쿠사나기 모토코라는 사이보그 여전사 캐릭터 자체도 많은 팬들을 확보하는 저력을 보였다. (41쪽)
건담에서 시작되어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었던 메카닉 디자인에 대한 상식을 한 번에 엎어 버린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메카닉, 에반게리온의 디자인은 로봇 애니메이션 디자인 역사에 있어 가히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늘씬하고 긴 팔과 다리, 튼튼한 로봇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가느다란 허리, 살짝 굽어진 등은 에일리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나사가 도는 정교한 관절도 보이지 않고 나이프가 장비된 어깨의 장갑은 지나치게 크다. 격렬한 전투로 인해 두부의 장갑이 벗겨지면 흉측하다 못해 마치 괴물 같은 얼굴이 드러난다. 그도 그럴 것이 에반게리온은 사실상 로봇이 아니다. 아담이라는 미지의 생명체로부터 복제한 인공생명체 정도의 해석이 옳을 것이다. 에반게리온의 정식 명칭은 ‘범용인형결전병기 인조인간 에반게리온’으로서 로봇이라기보다 인조인간과 병기의 측면이 부각된다. 즉, 인공생명체에 여러 가지 기계 부속을 삽입하고 장갑을 둘러 만든 사이보그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반게리온은 거대로봇의 전통적인 몇 가지 특징을 잘 따르고 있다. (62-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