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몇 년. 송파세무서에 세 번째 폐업 신고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둑한 길을 걸으면서 나는 ‘예술과 미학’ 시간에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해서, 무엇이 내 감정을 그렇게 폭발시켰는지에 대해서 문득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소속감의 문제였다. 내 팔을 내가 흔들어 사는 청춘을 살아가면서 나는 언제나 그것과 싸워야 했다. 돈이 잘 벌릴 때나 아닐 때나,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나는 안정적인 소속이 없다는 사실에 불안해해야 했고, 실제로도 그것은 가장 괴롭게 다가오는 점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지금 잠시 고생할 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지만, 사실은 어떤 집단이든 소속이 있는 친구들을 보면 굉장히 부러웠고 한편으론 많이 아팠다. 그러니까 혼자서 멀뚱멀뚱 살아보고자, 어딘가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이름으로 살아보고자 결심했던 대학 4학년 시절에는, 이제 곧 ‘소속 없음’의 상태가 된다는 사실이 막연히 두려웠던 것 같다. 너무 막연해서 그 불안이 나를 얼마나 괴롭히고 있었는지 몰랐을 뿐이다. 그래서 “어찌 됐든 힘내”라고 마음을 담아 이야기해주는 교수님의 친절하고 따듯한 말이, 누군가 위로해주었으면, 알아봐주었으면 했던 그 당시의 나를 크게 자극했고, 끝내는 눈물을 터뜨렸던 것이다. 소속 없는 청춘을 선택한 사람은 언제나 힘을 내야 했다. 억지로라도 그것이 꼭 필요했다.
---「“힘내세요” 한마디」중에서
홍대에는 특히 안철수에 관한 낙서가 많았다. 주로 상대편 후보 혹은 당시의 정치 상황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그 낙서들은, 대부분 철수 씨의 새정치를 기대한다는 희망적인 내용으로 끝났다. 형식은 거친 구호에서 재기 발랄한 농담과 그림까지 다양했다. 가끔 그러한 낙서들 아래 “도대체 새로운 정치라는 게 뭐냐”라며 따지는 낙서들이 이어지기도 했고 “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른다”라는 꼰대스러운 훈계들도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공감 가는 내용이 많았지만, 때론 울컥하여 반박하고 싶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내용의 낙서든지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길 바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일종의 건강한 풍경이었다. 다만, 밑도 끝도 없이 빨간색을 들이대는 구절들에서는 몹시 불쾌해졌다.
---「홍대 앞 안철수」중에서
그러다가 문득, 내가 참 젊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무덤을 찾아다닌다고 해서 어느 누구의 비난도 받지 않는 것처럼. 무엇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고, 용서 받을 수 있는 젊음의 권리를 나는 톡톡히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그 당시의 나는 신체적으로 가장 완전한 시기였고 정신적으로는 온전히 뜨거웠으며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렇듯 완전하게 젊은 시기는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가슴에서 더운 입김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죽은 자들의 공간에서 팔팔 뛰며 살아 숨 쉬는 젊음을 실감했고, 비로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혹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근사한 마음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여름의 묘지, 근사한 마음」중에서
나는 그날, 24시간 문을 여는 카페에서 글을 쓰며 ‘아버지의 청춘’이 나의 극복 대상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청춘에 대해 언제나 불같이 화를 내며 내키지 않아 했지만, 사실 뒤에서 조금씩 힘을 실어준 것은 다름 아닌 나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훗날 위대한 만화가가 되겠노라고 선언했을 때, 후룩후룩 화를 내며 “만화 따위로 어떻게 먹고살라고 그러느냐”라고 말했던 것은 아버지였지만, 며칠 뒤에 ‘미래의 만화산업’이라는 신문 기사를 오려 내 책상 위에 올려놓은 것도 아버지였다. (……) 거기까지 생각하자 가슴이 쓰렸다. 나는 정말로 당신과 똑 닮은 아들이라, 당신의 속을 까맣게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만만한 아들이 아니므로, 앞으로도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처럼 지나버린 시절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좀 더 맹목적으로 지금을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나름대로 분명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분간 아버지에게 나는 계속 미안하고 또 억울해할 것이며, 아버지도 필요 이상으로 흥분할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다만, 이번 일요일 새벽에는 나의 아버지와 함께 한강 둔치로 따끈한 우동 한 그릇 먹으러 가고 싶다. 당신이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우리가 마주 앉아 먹었던 즉석우동이 내 나부랭이 같은 청춘의 글쓰기에 뿌리가 되었노라 고백하고도 싶다.
---「 아버지와 우동 한 그릇」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