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범죄자란 어떤 존재일까?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죄를 원죄sin와 범죄crime로 나누어왔다. 원죄는 인간이면 누구도 예외 없이 가지고 태어나는 본성상의 죄를 말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조차 이러한 본성상의 죄를 자백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편 5절) 원죄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는 일종의 신분이나 지위를 의미하기 때문에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규범에 비추어 문제 삼거나 처벌할 수 없다. 보통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구원은 궁극적으로 이 원죄를 해결한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 범죄는 인간이 살면서 행동으로 짓는 죄를 총칭한다. 보통 인간관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죄가 여기에 해당한다. 비행, 나태, 비방, 거짓, 사기, 강간, 살인 등 모두 다 열거하기에도 벅차다. 이 죄는 원죄와 달리 행위로 드러난 잘못이므로 일정한 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다. 『성서』에 등장하는 ‘십계명’은 이런 죄악을 다스리는 데 사회가 필요로 하는 가장 초보적 수준의 보루다. 학창시절 배웠던 고조선의 팔조금법이나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요약되는 동해복수법同害?讐法이 인간의 문명만큼 오래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범죄가 인간사회에 항존하는 위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보통 사회가 말하는 정의와 법치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범죄를 다스린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성당이나 교회에 가면 종종 듣는 수사修辭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서 말하는 ‘죄인’은, 앞서 말한 것처럼, 생득적으로 원죄를 지닌 사람sinner이지 직접 죄를 저지른 범죄자criminal는 아닐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죄의 근거를 나눠서 의미의 제한을 두는 건 인간이 모두 죄인이라는 종교적 고백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라면 일상에서 누구나 범죄자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범죄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다. 범죄자의 자격, 죄악의 혈통, 죄인의 씨앗 같은 건 없다. 앞에 예를 든 이씨를 두둔하고 싶지는 않지만, 경제적인 상황이 그렇게 극단적인 수준까지 그를 몰아가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쯤 그는 고향에서 유력한 사업가로 만인의 존경을 받고 있을지 모른다. 우린 누구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원죄가 아닌 범죄가 우리의 일상 속에 언제고 비집고 들어올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구원이 아니라 정의다. 서로 다른 심리를 알고 이해하면서 서로 배려하고 살아가야 한다.
영화 「신과 함께―인과 연(2018)」을 보면, 성주신(마동석)이 “세상에 악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다만 악한 상황만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정말 그렇다. 상황을 이해하기 전에 죄의 판결은 있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실정법이 말하는 범죄는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잘못된 행위를 가리킨다. 때로 법이 너무 느슨해서 요리조리 법망을 피해갈 수도 있고, 때로 법이 너무 엄격해서 사회 구성원 대부분을 준범법자로 만들 수도 있다. 흔히 우리가 규정하는 ‘범죄’라는 정의에 사회구조적인 함의가 있다는 뜻이다. 범죄가 성립하려면 죄 이전에 법이라는 체계가 세워져 있어야 하며, 그 법이 지탱하는 사회가 앞서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하나의 일원으로 살고 법이 우리 앞에 존재하는 한, 우린 누구나 범죄의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점은 사회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깊이 고민해야 할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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