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으로서는 견디기 힘들 법한 내용들이 지뢰처럼 들어 있는 게 서양철학인데, 그중 전투력 ‘만렙’인 최고 전사가 니체다. 나는 읽는 사람을 후려 패는 듯한 니체의 글을 참 좋아하는데 니체가 특히 열과 성을 다해 두들겨 패는 것이 바로 기독교와 크리스천이다. 책 속에서 망치를 들고 뛰어다니는 느낌이랄까. 니체 세미나 시간이 되면 나는 마음을 콩닥거리며 독실한 친구들의 안색이 혹시나 고려청자 빛으로 변하는 건 아닌지 살피곤 했다.
--- p.23
리카 반도는 ‘메이슨 자’라는 이름으로 여러 작품을 제작했는데, 병에 새겨진 글자를 부제로 붙이기도 하고 곁들인 소품이나 배경에서 부제를 따기도 한다. 이 작품은 계절감이 주는 아름다움, 그 청량한 색감에 대한 찬사를 부제로 선택한 듯하다. 배경은 은은한 파스텔 톤인데 유리병 안의 색깔은 오히려 선명하고 진하다. 한복 치마저고리 일습처럼 고운 옥색과 청량감 있는 빛이 어우러져 매끄러운 질감으로 반짝, 하고 빛나고 있다. 여름의 색, 빛, 향기. 저 멀리로는 열기와 습도 같은 것까지 고루 느껴지는 작품이다.
--- p.38
보는 순간 이게 뭐지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우선은 책의 모습과 쌓인 모양이 너무 신기했다. 조각 케이크 같기도 하고 특이한 상자 같기도 한 책갑들. 그런 책들이 삐뚤거리며 차곡차곡 쌓인 모습이 재미있는데, 그렇다고 또 불안한 느낌은 크게 없이 희한한 균형감을 이루는 게 오묘했다. 대접을 서로 마주 보게 엎어 쌓아 스릴 있으면서도 왠지 안정감 있는 원형을 만들어낸 감각도 놀라웠다.
--- p.61
사과나무와 크로커스 그림을 보면 홉스의 자연 상태가 생각난다. 탐스러운 사과를 바라보며 서로 눈치를 보는 원시인들의 치열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고, 그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도 덩달아 전해지는 것 같다. 검은 바탕에 놓인 사물은 그게 무엇이든 그 본연의 색이 더욱 또렷이 빛나게 마련이다. 그렇게 원시인들 사이에 만연한 두려움 속에서 재화를 향한 욕망은 더욱 뚜렷한 빛으로 도드라진다. 이렇게 홉스의 자연 상태는 불신과 적개심이 팽배해 있어 야만적이고 불행한 곳이다.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지속되는 불안과 공포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곳이다.
--- p.80
허영심은 본래 상대가 나를 인정해주는 데서 오는 만족감인데, 상대와의 간극을 벌리면 벌릴수록 내 만족감은 채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보기에는 별것 아닌 인간들이 나를 칭찬하고 인정해봤자 나에게는 별로 큰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는단 얘기다. 내 고운 비단옷을 두고 노비 언년이가 아무리 침이 튀기도록 칭찬해봤자, 옆 동네 땅 부자 최 참판네 마누라가 감탄하며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은근히 묻는 것처럼 기분이 좋지는 않다.
--- p.103
오만 원권 지폐에는 어몽룡의 다른 월매도가 들어 있다. 개인적으로 대나무를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탄은 이정1554~1626의 풍죽도 와 은은히 겹쳐둔 것까지는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영 어색해졌다. 시원스럽게 솟아 있던 매화 가지가 짤뚱하니 잘려나간 데다 달도 억지로 깔고 앉은 듯하다. 높이 솟은 가지가 주던 미감이 없어지니 매화의 고고함도 숭덩 잘려나간 느낌이고, 높은 가지와 나란히 고즈넉한 하늘에서 빛나던 달을 가지 아래로 훅 끌어내려놓으니 달 역시 어리둥절한 느낌이다.
--- p.127
예수님께서 주먹질을 하시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이탈리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있는 그림인데, 이 예배당은 바로 슈클라가 정의보다는 불의에 천착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밝힌 바 있는 지오토(Giotto di Bondone)의 불의(Injustice)라는 그림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너 좀 이리 와봐”의 화끈한 왼손과 “한 대만 맞자”의 나이스한 오른손을 선보이시고, 붙들린 자는 당황하며 “아 저 그게요”의 표정을 짓고 있다.
--- p.149
불의를 자행하는 권위적인 힘과 물리적 폭력이 주로 전통적인 남성성과 연결돼온 반면, 불의에 신음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희망으로 자비로운 모성에 기대고자 하는 원초적인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나를 부당하게 억압한 강자에게는 정의의 힘으로 벌을 주고, 억압당한 약자인 자신은 자비의 마음으로 품어주기를 기대하는 마음. 말하자면 괴롭힘을 당한 아이가 울면서 내 마음을 치유해줄 포근한 엄마 품을 찾는 것 같은.
--- p.158
2016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를 뽑는 예비 경선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는 어느 대학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정의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 싶은 만큼 타인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 황금률은 사실 지구상 모든 종교에 등장하는 원칙이자 동양 고전인 《논어》에도 등장하는 내용으로, 굳이 어려운 표현 없이도 정의의 내용과 원칙을 많은 인류에게 전하고 또 권하고 있다.
--- p.178
민주주의도 싫고 사회주의도 싫고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도 꼴 보기 싫고 국제주의적 이상도 싫다. 모두 적이다. 이렇게 세상에 믿을 게 하나 없고 다 무서운 적이라는데 사람들 마음속에 불안과 공포가 스미는 것이 당연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대중에게 파시즘이 권한다. 이 혼란스럽고 기댈 곳 없는 세상에서 그래도 너를 지켜줄 강력한 지도력을 한번 믿어보라고. 그래서 그림 속 발들은 어딘가로 이끌려 향하고 있다.
--- p.199
그런데 그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들이 전부 빈 네모로 표시되었다. 아직 입장 전이라거나 단체로 화장실 가신 것도 아니다. 자제분들로 보이는 이들이 분홍빛 옷을 입고 모였는데 술잔을 들어 올리는 사람도 있고 앞에서 춤추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때맞춰 마님이 부르신 듯 비어 있는 네모 을 쳐다보는 시종들도 있다. 그러므로 이 명문가의 부인들이 모두 자리에는 있었으나 그린 이가 의도적으로 모습을 지운 것임을 알 수 있다.
--- p.243~244
당시 유럽에서 태피스트리는 왕족과 귀족들에게 굉장히 선호되었는데 여러 이유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운반의 편리성이었다. 1가구 1주택 따위 평생 모르고 여기에 궁전, 저기에 별장, 거기에 성이 있던 그들로서는 레지던스를 옮길 때마다 편하게 둘둘 말아 운반할 수 있는 데다 벽에 걸어 추위도 막고 아름다운 장식성도 충족시킬 수 있는 이 기특한 아이템이 몹시 흡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보다시피 태피스트리는 엄청난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루벤스 같은 화가의 원본 스케치도 있어야 할뿐더러 사람이 일일이 그 수많은 매듭을 지어 커다란 작품을 완성하려면 돈도 시간도 어마어마하게 들었던 것.
--- p.259~260
그리하여 니체는 모든 사람에게 위버멘쉬가 되라고, 아이가 되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허물고 부수고 또다시 쌓는 행위를 무한히 반복하며 즐거워한다. (…) 아이들에게는 아직 내세의 개념도 초월자의 개념도 희박하다. 아이들을 위한 예쁜 그림책을 만드는 한 작가님과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슴에 들어와 박힌 그분의 말이 있다. 아이들은 “지금을 사는 존재”라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지금을 사는 존재, 그들이 바로 위버멘쉬다.
--- p.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