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나라를 거쳐 지금 있는 영국으로 오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보람 있는 일도 많았고, 난관에 부딪혀 힘들 때도 있었다. 혼자 힘으로 그런 일을 모두 겪어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한국을 떠나 타지에서 큰 사고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새로운 선택과 마주하거나 지금 가는 길이 옳은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면 그들을 떠올렸고, 덕분에 최선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을 향한 책임감 때문에 유혹에 빠지거나 쉽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책을 빌려 감사드린다.
공부하면서 힘들 때마다 ‘공부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 이곳에 오고 싶어도 못 오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곤 했다. 이 글은 10년이란 세월을 외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 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 지난 세월을 들려주듯 담담하게 써나간 것이다. 책을 읽는 독자들도 내 가족이자 친구처럼 맞장구쳐주면서 내 얘길 편하게 들어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겪은 시행착오가 아직 떠나지 못하고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이고 있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프롤로그 중에서
“뜬금없이 웬 중국이야?”
2000년 봄, 중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하자 가족들과 친구들의 반응은 이랬다. 미국도 아니고 유럽도 아닌, 모래 먼지만 풀풀 날리는 중국에 가서 뭘 하느냐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한문 공부를 많이 하더니 중국어가 다른 외국어보다 쉬워 보여서 그런 것 아니냐고 묻기도 하셨다. 사실 뚜렷한 목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일본에 비해 물가도 싸고 비행기로 두 시간이면 도착하는 가까운 외국이었기 때문에 끌렸던 것 같다. 사람들 생김새도 비슷해서 덜 낯설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조만간 엄청난 힘으로 세상을 위협할지도 모르니, 미리 문화나 생활을 익혀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13억 명 이상이 쓰는 말인데, 중국어를 배워놓으면 손해 볼 일은 없지 않을까? 이런저런 고민 속에 결정한 중국 유학은 말리는 사람도, 그렇다고 부추기는 사람도 없이 참으로 외로운, 내 인생 처음 떠나는 유학이었다.
---2장 「중국에 가서 뭘 하겠다고?」 중에서
꿈이란 게 신기하다. 계속 같은 꿈을 꾸다 보면 어느새 그쪽으로 길이 열리고 꿈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선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꿈만 꾸고 만다면 결국 꿈은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나는 머릿속에 떠다니는 막연한 꿈을 시간이 날 때마다 나만의 꿈 노트에 적어둔다. 습관처럼 미래를 상상하며 적어보는 노트에는 짧게는 내일, 길게는 몇 십 년에 걸쳐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이 빼곡히 적혀 있다. 활자화된 미래의 꿈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뛴다.
---3장 「공짜로 시작한 일본 유학」 중에서
수업이 끝나고 지하철에서 내려 30분은 되는 거리를 걸어 집에 오면, 밥도 못 먹고 그날 수강한 과목의 과제와 각종 신청서를 처리해야 했다. 매일 이것만 제출하고 다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너무 힘들었고, 도저히 이대로는 못 살겠다 싶어 나쁜 마음을 먹을 때가 많았다. 이러한 생활은 여름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되어도 계속되었다. 숙제만 마치면 죽는 방법을 생각해야지 했는데 모두 끝내면 지쳐서 쓰러져 자기 바빴고, 다음 날이 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학교 가기에 바빴다.
학교 가는 길에 약국을 볼 때마다 오늘은 돌아갈 때 잊지 않고 수면제를 사겠다고 마음먹고는, 집에 갈 때는 수업 시간에 왜 그렇게밖에 못했을까 하는 자괴감에 빠져 약국에 들르려던 계획
은 까맣게 잊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서는 역시나 과제와 각종 신청서 처리에 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수면제 살 기회를 놓쳤고, 어느새 난 졸업을 해버렸다. ---4장 「공부한다고 돈이 나와 밥이 나와」 중에서
보건소를 포함해 병원 비슷하게 생긴 곳을 대여섯 군데 돌았는데, 하필이면 그날이 무슬림 명절이라서 진찰하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서럽게 눈물이 났다. 처음엔 눈물만 뚝뚝 흘리다가 울음소리가 커지자, 동행한 친구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어깨만 두드려줬다. 어렵사리 병원을 찾아갔더니 피 검사를 해야 한다며 다짜고짜 손을 내밀라고 하는데, 의사가 내미는 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소독도 안 된 칼 때문에 에이즈에 걸리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동행인을 불러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 실컷 울어서 그런 건지, 점심에 먹은 죽 때문인지, 내가 언제 아팠나 싶을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식당으로 가서 여전히 걱정하고 있는 종업원에게 이제는 괜찮다고 했더니 울상이던 친구가 활짝 웃으면서 먹고 싶은 게 없느냐고 또 물었다. 갑자기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졌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주식인 인제라 위에 같이 내는 소스를 현지어로 ‘마하바라위’라고 하는데, 이 소스 중에 ‘슈로워트’라는 게 있다. 콩이 원료라서 그런지 우리나라 된장찌개랑 맛이 비슷해서 그것을 달라고 부탁했다. 혹시나 하면서 슈로워트를 좀 묽게 요리하고 거기에 얇게 저민 감자를 넣어 보글보글 끓인 후, 풋고추를 총총 썰어달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정말 그 비슷한 걸 가져왔다. 그날 땀까지 흘리면서 죽과 에티오피아 버전의 된장찌개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덕분에 가뿐해진 몸으로 그곳에서 무사히 조사를 마칠 수 있었다.
---5장 「영혼을 울리는 고향의 맛」 중에서
영국에 오면서 10년짜리 전자여권을 새로 발급 받았다. 이 여권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도장을 찍게 될까 생각하곤 한다. 아무도 공부하라고 등 떠밀지 않았는데, 공부하며 유랑한 세월이 이제는 10년이 넘었다. “이젠 끝내야지” 하는 사람들도 없고 나도 그런 마음이 안 생기는 것을 보면, 당분간은 공부 유랑이 지속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 유랑지가 어디가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중략)
사실 아무도 내게 졸업하면 무엇을 하겠냐고 묻지 않는다. 결혼하지 않냐고 묻지 않는 것만큼이나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2011년 봄부터 에티오피아의 커피 산지에서 6개월간 현지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돌아와서는 부지런히 논문을 쓸 테고, 이변이 없는 한 1년 후에는 논문이 나올 것이다. 박사 학위가 공부의 최종 목적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마무리하고 싶다. 그 이후에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학생으로서 하는 공부는 당분간 안 할 것이다. 아마 70이나 80살쯤 되어 그때에도 건강하면 남미나 동유럽 어느 나라의 대학에서 다시 대학생이 되어 공부하고 싶다. 내가 이런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알면 충격을 받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에필로그 「다시 새로운 유랑길에 나서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