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종북논쟁’의 이념갈등은 국론 분열의 전형이다. 뿐만 아니라 세대 간의 상충, 전통과 초현대의 혼종, 종교 교단 내의 분열, 자살과 정신질환의 폭증 등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이 심각한 아노미와 ‘사상의 혼돈’ 속에 빠져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생각과 사상의 혼란’은 어디서 비롯하는 걸까. 우리가 그 동안 당연하다고 믿어 온 생각들의 뿌리는 무엇일까. 이런 의문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유형, 무형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굵은 줄기의 사상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p.7
새로운 생각과 상상은 원칙적으로 ‘불온’ 합니다. 새로운 생각은 작게는 개인의 일상을 바꿉니다. 혁명적 사고는 기존의 사회에서 새로운 꿈을 꾸는 새로운 생각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새로운 생각이 역사의 물꼬를 바꾸고, 사회를 바꾸고, 나아가 세상을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생각의 역사적 흐름을 다음 장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p.28
Q.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이나 태도에 흔히 냄비근성이라 표현하는, ‘뿌리가 약한, 변덕스러운’ 등의 특징도 하나 넣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너무 좋은 쪽 으로만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웃음) ‘현재적’이니까 현재가 바뀌면 또 바뀌겠지요. 이것들이 다 꼭 좋은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어요. 예를 들어 ‘현재적’이라고 하면, 현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물질 중심적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느 정도는 현재를 억압하고 금욕해야 미래를 좀 기약할 수 있는데 우리는 다 써버리는 문화니까요. 황금만능주의 문화가 팽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하지만 이 같은 메커니즘이 경우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주의적 시각은 포용은 하지만 역사 단절은 못하잖아요. 우리가 광복 이후 일제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도 상대주의적 관점입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어디 있느냐는 식의 사고방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친일 안 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식의 사고방식 말입니다. 서양의 경우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하는 일이지만 우리에겐 그렇듯 딱 잘라 처리하는 방식이 어색했던 겁니다. 그러니 어떤 특징도 그것이 반드시 좋기만 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p. 47
서구 지식인들은 답답하면 고대 그리스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답답하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의 다 서양 인문학입니다. 뿌리가 없습니다. 유행 따라,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갑니다. 요즘은 우리 것을 연구하자는 움직임들이 좀 있고 책도 보고 하던데, ‘한자’에서 딱 막힙니다. ...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의 제로 포인트는 무엇인가? 우리의 정신적 고향은 무엇인가?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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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유일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꼭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러했고요. ‘사춘기’ 단계라고나 할 까요? 하지만 지금은 그 유일신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내부에서 무너지고 있죠. 그것이 종교개혁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새로운 다신교, 범신교겠죠. ---p.102
서양의 현대 사회과학자들은 자신들을 ‘계몽주의 철학의 후예’라고 곧잘 표현합니다. 계몽주의의 시작은 인간의 합리성을 더욱더 중시하고 이것만이 믿을 수 있는 것이란 태도였습니다. 이 시기가 서양 역사 중 가장 낙관적이고 진보적인 시각을 가졌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점점 진화하고 발전해간다’는 관점이 지배적이었으며,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을 것이다’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세속 세계에서 지상낙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칸트(I. Kant, 1724~1804)는 이 시기를 ‘인류가 미성년의 시대에서 성년의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라고 표현하기도 했죠. ---p.114
모든 제국주의가 그러했습니다. 제국주의 중에 식민지 국가를 침략하고 약탈하면서 ‘당신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누구를 위한 집단주의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집단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혜택 받는 사람은 누구인지를 지식사회학적으로도 분석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참된 공동체에는 ‘착취’의 개념이 없어야 합니다. ---p.143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면밀하고 통합적인 폭로와 그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은 마르크스에 의해 비로소 체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물론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을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 또 실질적 대안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깊이 있는 질문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숙된 개인주의를 통과해야만 그 다음에 참된 사회주의가 올 수 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공산주의에서의 개인도, 집단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그 사회 속에서 꽃피는 개인이었습니다. 사회 안에서, 집단 속에서 참된 개인이 완성되는 사회라는 말이죠. 따라서 사회주의와 개인주의가 언제나 배타적이고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겠죠. ---p. 168
마르크스가 사유재산이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병폐라며 사유재산을 폐지하려 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그는 영국의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자들의 ‘사유재산 때문에 노동의 소외가 일어난다’는 주장을 천박하기 짝이 없다고 비판하며 「경제학 철학 수고」를 통해 ‘소외된 노동의 결과가 사유재산이다’라고 역설적으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사유재산, 계급 갈등에 대한 부분을 아주 순진하게 이야기하며, 사유재산을 ‘사회악’이라고 규정했었죠. 하지만 이것이 현실에 대한 정확하고 과학적인 분석이 되지 못하고 아주 표피적인 분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마르크스가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사유재산 때문에 노동의 소외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노동의 결과가 사유재산’이라는 것이었죠. ... 마르크스는 사유재산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고, 사유재산을 부정한 것도 아니며, ‘사유재산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사회’를 꿈꾸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만 알아도 됩니다. ---p.184
생태주의는 정치, 사회, 철학 등 모든 종류의 학문과 이상 추구의 마지막 버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생태주의가 나왔을 때만 해도 ‘부르주아적 사상’이라는 비판을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생태주의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p.218
그러고 보니 어느덧 마지막 시간이군요. 가벼운 맘으로 시작한 강의였지만 마칠 때가 되니 이런저런 생각에 새삼스럽습니다. 문득 제가 강의 시작에 앞서 ‘삶은 생각이다’라고 했던 것이 기억나네요. 여러분에게 잘 와 닿지 않는 말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흔히들 ‘삶은 행동이다’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삶은 생각이다’라는 말은 단순히 ‘관념이 최고’라는 얘기를 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삶은 기본적으로 물질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지만 이러한 물질적 조건이 변화하지 않을 때, 객관적 조건이 우리를 옥죄고 있을 때, ‘탈출구는 없는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 번 뒤바꿔 생각을 해보자는 뜻에서 던진 화두이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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