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을 자르면 어떨까. 분신자살에 비하면 박력도 떨어지고,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자들이 선택하는 방법 같아서 한심하기는 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죽고 나서 죽은 방법에 대해 칭찬을 듣건 욕을 듣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 그걸로 할까. (중략) 손이 흔들렸는지 칼날이 미끄러져 손가락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얏. 우왓, 피다. 연분홍색 살점이 드러난 상처부위에서 피가 솟아오르는 꼴을 본 순간 통증이 격렬해졌다. 아야아야아야얏. 그만두자. 히데요시 결의는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아픈 건 때려치우자. 손가락 끝을 조금 베었을 뿐인데 이렇게 아프잖아. 아픈 건 안 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목매기도, 뛰어내리기도, 불 싸지르기도, 손목 자르기도 다 때려치워. --- p.22
“훗훗훗, 나 말이지, 지금까지 말 안 했는데, 나쁜 사람이야. 악당이라고. 후후후.”
입속으로 웃으며 나쁜 사람에 어울리는 표정을 지었다.
“후후후.” 덴스케도 웃어준다. “웃지 마.”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어쨌든 맞거든. 얌전하게 말 잘 들으면 집에 보내주지. 하지만 소란 피우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뱉어냈다. “맨 입으로는 못 넘어가니까.”
“말 잘 들을 테니까, 응, 말 잘 들을 테니까…….” 덴스케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애원한다.
“어어……, 얌전히 말 잘 들으면 말이야.”
“집에는 보내지 마.”
“…… 뭐?”
“싫어. 집에 가기 싫어. 나, 가출했단 말이야.”
손에서 휴대전화가 미끄러질 뻔했다.
“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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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을 보고, 특징을 말해 봐.”
“우웅, 코 밑에 입이 있어. 코 위에는 눈. 머리 위에는 머리카락.”
좋아, 좋아. 역시 바보다. 하지만 바보라서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또 하나 있어, 특징.”
“응? 뭔데?” 히데요시는 신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딘가 이상한 얼굴.”
역시 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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