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생각이 어떠냐? 여래는 ‘나에게는 말할 만한 법이 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여, 그대는 지금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여, 만약 여래에게 말할 만한 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며 잘 판단한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여, 법을 말하지만 얻을 법은 없다. 그 때문에 법을 말한다고 일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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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닦는다면, 범부의 법을 버리지도 않고 성현의 법을 취하지도 않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반야바라밀에서는 취할 수 있는 법도 볼 수 없고, 버릴 수 있는 법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닦는다면 좋아할 열반도 볼 수 없고 싫어할 생사도 볼 수 없습니다. 무슨 까닭일까요? 생사라는 것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버리겠습니까? 열반이라는 것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좋아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닦는다면, 버려야 할 번뇌도 볼 수 없고, 취해야 할 공덕도 볼 수 없습니다. 모든 법에서 마음은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무슨 까닭일까요?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법의 세계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와 같을 수 있다면, 일러 반야바라밀을 닦는다고 합니다.
--- p.167
깨달음의 모습은 공(空)이어서 나타낼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름과 깨달음, 둘 모두 공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공이기 때문에 언어도 공입니다. ……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성취할 것도 없고,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어서 분별할 수 없고, 말도 없고 설명도 없어서 나타낼 수 없고, 오직 미묘(微妙)한 지혜만이 스스로 내면에서 경험하여 압니다. 모든 여래께서 모든 법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끝내 텅 비고 고요함이라는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인데, 세간의 필요에 응하여 방편으로 이름을 세운 것입니다.
--- p.287-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