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출은 바닥에 쓰러진 청년을 보곤 바로 고개를 돌려 골목 안쪽을 살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그게 무엇이든 손쓸 여유는 전혀 없었다. 대여섯 명의 일본 순사가 이미 침침한 지점을 벗어나 가까이 오고 있었다.
왼쪽 어깨에서 피가 많이 흐르는데도 청년은 오른손만으로 몸을 일으켜 다시 달리려 했다. 무리였고, 너무 늦었다. 일어선 그는 장총을 든 순사들에 둘러싸였다.
--- p.21
“거기엔 일본의 수많은 정관계 인사와 내외신 기자가 운집해 있었는데 여운형 선생님은 3·1운동의 의의를 딱 한마디로 정리하셨대요. ‘대한민족은 3·1운동을 통해 전부 각성하였다!’라고요. 감히 우리 민족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메시지였죠. 고모부는 그 연설을 들으면서 온몸에 전율이 솟는 느낌을 여러 번 경험하셨대요. 특히 선생님이 말미에 ‘조선의 독립운동은 신의 뜻이다’라고 외치실 때는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래요.”
--- p.32
“그래서 결국은 독립운동이 최우선이라고 하는 건가? 우리 고모부가 그러셨잖아. 여운형 선생님이 제일 강조하시는 건 언제나 나라 찾는 일이라고. 좌파든 우파든, 사회주의자든 민족주의자든, 조선 사람이라면 일단은 모두 힘을 합쳐 그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이야.”
--- p.67
옥출은 개회식이 끝나고 마련된 오찬 석상에서 몽양과 처음 대면했다. 유일한 학생 참석자였지만 어른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조금도 기죽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안내된 자리에 앉아 평소처럼 밝고 상냥하게 주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으려니 몽양이 저 멀리 홀 입구에서부터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 p.120
옥출은 그해 겨울을 몽양을 생각하며 맞았다. 큰고개골에 부는 바람이 매서워졌음을 느끼면서, 강의실 창밖으로 첫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안동교회 앞마당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워 장식하면서, 그리고 본정통을 흐르는 크리스마스캐럴을 들으면서 문득문득 그를 생각했다.
--- p.124
저게 바로 일본 제국주의 지도층의 전형적인 삶이야. 자기네 군대를 시켜 멀쩡한 남의 나라를 잔인무도하게 빼앗고 나선, 막상 자기네들은 그 식민사회에서 점잖고 예의 바른 문명인 행세를 하며 온갖 영화는 다 누리는 거지. 그렇게 살아온 삶을 지금 내 앞에서 어릴 적의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들려주는 거야? 자기가 이 땅에서 얼마나 격조 있고 품위 있게 자라왔는지 알아달라는 거야? 난 식민지의 딸이야! 달라, 당신과는 너무 달라.
--- p.172
몽양이 그리웠다. 요코하마 항구에서 상하이 가는 배에 올랐을 때 그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홀로 부두에 서 있었다. 잘못 봤는지 모르지만, 거기 그냥 우두커니 서서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자주 떨어져 있긴 했어도 햇수로 3년에 걸친 그와의 일본 생활이, 그때의 하루하루가 활동사진처럼 빠르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 p.215
그러나 역시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콜론타이의 글이 최고였다. “남녀 간의 사랑은 동지적 사랑이며 자각한 남녀의 사상적 결합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매력을 느낄 때 연애하는 것은 누구하고도 언제든 자유이다. 그 연애가 사회 진보에 공헌할 수만 있다면…….” 옥출은 마음속으로 자기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또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 p.230
고모는 끝부분에 허정숙 얘기도 길게 썼다. 항일 무력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 타이항산에 있는 조선의용대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남들은 모두 죽을 길이라며 말렸지만, 그게 당당히 살 수 있는 길이라며 떠나갔다고 했다. 그 대목에서 옥출은 가슴이 마구 뛰었다. 항일 무력투쟁! 당당한 삶! 조선의용대!
--- p.262
“전 독립된 주체로 살길 작정하고 여기로 왔습니다. 일제와 싸울 거예요. 그들을 몰아내는 데 앞장설 거예요. 그래서 조선이 해방되고 민주공화국이 들어서면 그때 당당하게 몽양의 여자로 살겠습니다. 그 전엔 저 혼자예요. 그저 조선의용군으로만 살 거예요.”
--- p.282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일제의 주구 하나가 푹 고꾸라졌고, 또 한 번 당기자 또 하나가 맥없이 쓰러졌다. 고백하건대, 쾌미와 비애가 동시에 느껴졌다. 사실은 그들도 사람인데…….
스스로 악을 응징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는 쾌감은 참으로 대단했다. 그러나 살인의 죄책감 역시 만만치 않았다. 숨을 크게 내쉬면서 눈을 감고 자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겁에 질려 파르르 떨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전의로 뭉쳐 있는 조그맣지만 악착같아 보이는 존재가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의 눈빛은 내일 또다시 전장으로 나갈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단호했다. 거부할 수 없어 보였다. ‘그래! 그렇다면 이제 자자’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잠이 부족하면 안 될 일이었다.
--- p.308
그때 드디어 옥출의 손에 그녀가 찾던 그것이 잡혔다. 차갑고 묵직한 금속 덩어리였다.
“이런 더러운 밀정 새끼!”
탕탕! 탕!
허갑이 가슴에 두 발, 얼굴에 한 발의 총을 맞고 머리가 터진 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즉사였다. 벽에 걸린 시계의 분침이 막 열두 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크리스마스였다.
--- p.358
옥출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기획이나 섭외 등과 같은 머리 쓰는 일보다는 경계와 호위 등과 같은 총 쓰는 일을 주로 맡아 했는데, 많은 공작원이 그녀의 사격술과 판단력 덕분에 일경이나 일제 헌병대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수행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그녀의 활동 지역은 점점 확대되었다. 처음엔 타이위안, 스자좡, 한단, 신샹新鄕 등의 타이항산 주변 도시에서 활동했지만 나중엔 동쪽으론 지난과 칭다오靑島, 북쪽으론 톈진天津과 베이징까지 갔다. 옥출은 1945년 6월까지 1년 넘게 그 일을 하면서 ‘타이항산 스라소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 p.362~363
옥출이 북쪽의 몽양이라고 여겨오던 무정도 죽은 목숨과 진배없었다. 김일성은 우상으로 떠받쳐질 만큼 절대 권력의 소유자가 되었건만 무정은 갈수록 그에게서 멀어져 실질적인 권한은 아무것도 없는 껍데기로 살고 있었다. 그는 남쪽은 물론 북쪽 세상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위치에 고립되어 막연히 세상 좋아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이 되면 주권재민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리라던 양쪽의 영웅은 사라졌다. 해방이 되자 외려 그 영웅들이 설 자리를 잃었다!
--- p.411
다리 한가운데에 이르러서도 그녀는 춤추듯이 걷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부서지고 뒤틀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지점들도 그저 무심하게 지나쳐 갔다. 마지막 절단 부분에 이르렀을 때, 그제야 겨우 멈춰서는 듯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잠깐 멈칫하며 하늘을 봤을 뿐 지금까지의 속도 그대로 공중으로 걸어 나갔다.
--- p.4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