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미국의 C. G. 융학파 정신분석가이며, 나중에 원형심리학(Archetypal Psycholgy)를 창시한 제임스 힐만의 Senex & Puer를 번역한 책이다. senex와 pue는 라틴어로 각각 노인과 소년 또는 젊은이를 뜻하는 말인데, 힐만은 그것들을 자연에 있는 하나의 원형들로 보았다. Puer가 모든 것이 시작될 때의 생동감, 즉시성, 창조성 등을 의인화한 것이라면, senex는 puer의 상태가 어느 정도 지나면서 안정되고, 질서가 잡히면서 전통과 권위가 생기는 것을 의인화한 개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puer를 대표하는 신이 디오니소스나 헤르메스라면 senex를 대표하는 신은 크로노스-새턴이나 제우스가 될 것이다. puer가 새로운 활력을 가지고 환상, 상상, 상승을 향해서 나아간다면, senex는 굳게 하고, 바닥을 다지며, 뼈대를 세워 나가는 자연의 원리라는 말이다.
본서에서 역자는 책 제목을 『노인원형과 소년원형』이라고 했지만, 본문에서는 puer/senex를 뿌에르/세넥스라고 음역(音譯)하였다. 독자들이 책을 읽으면서 puer/senex라는 개념에 익숙해지면 노인원형/소년원형보다 더 포괄적인 사상(事象)을 포촉할 수 있을 테고, 힐만 역시 그런 생각에서 그것들을 본문에서 영어 단어가 아닌 라틴어 puer/senex로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제임스 힐만은 취리히에 있는 C. G. 융 연구소에서 수련 받고, 1969년까지 동 연구소에서 연구 책임자로 일하였지만, 1970년 Spring Publications를 설립하면서 분석심리학을 신화, 철학, 예술 등과의 관련 아래서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발달시켰는데, 그 결과가 1975년에 나온 『수정된 심리학』(Re-Visioning Psychology)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에는 생명을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인 환상이 있으며 정신치료는 신화, 환상, 상상을 통해서 그것을 찾아 “영혼-만들기”(soul making)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책에서도 그의 이런 생각은 잘 나타난다. 그는 융이 고안한 개념 뿌에르를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융이나 융의 생각을 충실하게 이어받은 폰 프란츠(M.-L. von Franz)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발달시킨 것이다. 폰 프란츠가 뿌에르를 주로 모성 콤플렉스에 영향을 받은 존재로 조금 부정적으로 생각한데 반해서, 힐만은 뿌에르가 모성 콤플렉스와 관계 없는 하나의 원형이고, 다른 원형들처럼 대극(opposite)인 세넥스와의 관계에서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면서 정신이 건강하게 되려먼 뿌에르와 세넥스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발달하지 않고, 둘 사이에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뿌에르와 세넥스는 한 사람 속에서만 작용하지 않고, 기관이나 사회, 국가에서도 작용한다. 어느 기관이나 사회, 국가가 처음 시작될 때는 뿌에르의 신선하고, 유연하며, 창의적인 면이 두드러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세넥스가 작용하여 경직되고, 딱딱해지면서 혼란에 빠지는데, 그것은 뿌에르의 새로운 기운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힐만은 현대 사회에 만연한 “신 죽음 현상”도 같은 관점에서 보았다. 현대 사회의 혼란과 무정신성은 물고기 좌에서 물병좌로 넘어가는 새 천년 시대에 새로운 정신성이 태동하려는진통이라는것이다. 이제 머지않아 “떠오르는 새벽빛”(Aurora Consurgence)이 떠오를 테니까 우리는 “신중하게 고려하고, 관찰하는 태도”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힐만의 주장 가운데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뿌에르와 영웅과 아들을 구별하였다는 점이다. 뿌에르는 세넥스와 대극 관계에 있는 독립적인 원형으로 보았지만, 영웅 원형과 아들 원형은 모성 콤플렉스와 관계된 원형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뿌에르-와-세넥스로 두 원형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작용해야 하는 것이라면, 영웅은 태모와 싸우면서 나아가고, 아들은 태모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보면서 그에 따르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살펴본 것이다.
그래서 힐만은 사람들에게 있는 영원한 것에 대한 동경이나 그리움, 방랑 기질 역시 프로이드처럼 모성 콤플렉스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영원한 것을 그리워하고, 그것을 찾으려고 떠나는 것은 어머니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 있는 그의 또 다른 나, 진정한 그 자신(Self)에 대한 그리움이며,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그에 대한 그리움을 찾는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면 그 그리움과 동경은 단순히 모성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좀 더 영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고, 인간의 삶은 정신치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완성을 향한 여정으로 된다.
또한 힐만은 영(spirit)과 영혼(soul)을 구별하고, 영을 꼭대기, 영혼을 골짜기라는 상징으로 표현하면서 진정한 구원은 영혼-만들기(soul-making)를 통해서 얻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영과 영혼은 꼭대기와 골짜기라는 상징이 잘 설명해 주듯이, 영혼은 우리의 몸, 현실,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는 정신적 내용이다. 그러므로 영혼-만들기는 몸이나 현실과 관계 없이 정신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끌어안고, 그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전체성을 이루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인들을 보면, 너무 영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 같아서 너무 공중에 붕 뜬 것 같아서 신뢰가 가지 않는다. 힐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힐만의 뿌에르성이었다. 그의 문장에는 상상력이 종횡무진으로 날아다니는 경우가 많아서 갑자기 튀어나온 그의 상상력을 따라잡지 못했을 경우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은 현상을 격파하고, 새로운 통찰을 가져다주는 신선한 자료들이어서 잘 따라가면 묘한 쾌감을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 그의 상상력은 그가 말하듯이 그리스-로마 신화, 북구 신화, 이집트, 바빌로니아 신화 등에서 나온 것이라서 그의 글에는 그 신화적 인물들이 많이 나오고, 그것도 주신(主神)들이 아니라 작은 신들, 요정들인 경우가 많아서 그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가능한 경우 본문에 역자 주 형식으로 설명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려고 하였다. 아무쪼록 이 책이 분석심리학과 인간의 정신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었으면 한다. 2020년 1월 20일 月汀
---「역자 서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