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싶다, 내가 사랑한 것과 똑같이, 그런 노래를 남기고 그녀는 뒤돌아선다. 신분의 차이, 어울리지 않는 사랑이었으니까.
카세트테이프를 꺼내 거기 적힌 글씨를 보았다. ‘춘희’라고 한자로 쓰고 난 후, 이탈리아어로 제목이 적혀 있었다.
라 트라비아타.
방황하는 사람, 길을 잘못 들어선 여자……. 그 의미를 떠올리면서 알파벳 위로 덧그려 나간다. 물 흐르는 듯한 필기체에서, 외국어에 익숙한 사람인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신분의 차이라는 말이 몹시 크게 울려 퍼진다. 요즘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그래도 좋아하는 것을 좋다고 말하는 건 어렵다.
먹던 킨코 참외를 멍하니 바라본다.
샛노란 겉모습은 아름답지만 이 참외는 미와시 어디에서나 열린다. 너무나 흔한 데다가 단맛이 강하지 않아서 아무도 먹지 않았고, 그래서 대부분은 여름이 끝나면서부터 썩어간다.
이 마을에 와서 처음 먹어보고 이 참외가 좋아졌다. 하지만 좋아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먹지 않는, 쓰레기나 다름없는 참외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자신의 취향이 쓰레기 취급을 당할 것 같아서.
키미코는 우걱우걱 소리 내어 킨코 참외를 씹었다. 그런데 곶의 집 사람들은 이 참외가 좋다고 말했다. 건네받은 참외를 먹는 속도가 빨랐던 걸 보면 테쓰지는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다.
신기했다. 같은 오이과로 견주어 말하자면 최고급품 멜론인 사람들이 이런 참외를 좋아하다니. 분명,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는 사람은 좋아하는 것을 당당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p.156
“예전에 어떤 손님이 그렇게 말했어요. 인간에게는 네 가지 계절이 있다고. 푸른 봄, 붉은 여름, 하얀 가을, 검은 겨울. 10대가 푸른 봄, 즉 청춘이고, 20대부터 30대가 붉은 여름, 마흔, 쉰이 하얀 가을, 마지막이 검은 겨울이죠.”
붉은 여름, 하고 키미코가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붉은 여름. 정말 맞아요. 이 시기에 여자는 늘 피투성이죠. 결혼하기도 하고, 이별하기도 하고. 혼자가 되기도 하고, 불륜의 아수라장에 휘말리기도 하고요. 아이를 낳기도 하고 잃기도 하죠. 주변을 둘러보아도 모두 다 피투성이예요. 본인이 뿌린 씨앗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요. 그렇게 여름의 태양처럼 시뻘겋게 불타오르다가 마흔이 넘으면 가을이 되는 거예요.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서서히 식어가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도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여름은 없어요. 서른아홉, 그야말로 여름의 끝이죠.” --- p.277
이 인생이어서 좋았다. 설령 잃은 게 있다 해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이제 두 번 다시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생각하지 않겠다. 그러니 저 산을 넘어가자.
마흔 즈음한 이 나이에 과감히 새로운 인생에 도전한 사람을 알고 있다. 서른아홉, 인생의 여름 끝자락에 처음 어머니가 된 사람이다. 설령 그 몇 년 후에 가장 사랑하던 남편을 잃었다 해도, 계속되는 계절을 마지막까지 밝게 산 사람.
곶의 집, 그곳의 주인, 사랑한 사람의 어머니다.
사람도, 사물도 변해 간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뛰어넘자. 변해감에 따라 좀더 좋은 미래가 오기를 바라면서.
저 산 너머에, 행복이 있다고 계속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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