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마 씨, 전 초등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요.”
여자는 고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쇼와 9년(1934)생의 비극이죠. 저희 학년이 입학한 해에 이 나라 초등학교는 국민학교(國民學校)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졸업한 해 다시 초등학교가 된 거죠. 오시마 씨는 국민학교를 아시나요?”
또다시 질문을 받은 고로가 이번에도 바로 대답하지 못한 것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쇼와 9년생이라면 여자는 현재 스물일곱 살. 고로보다 다섯 살 연상이다.
“아, 네, 국민학교 말씀이죠. 1년 다녔습니다. 아직 어렸을 때라 기억은 잘 안 납니다만.”
“다행이에요. 6년 다니면 평생 잊을 수 없어요.”
소국민(小國民)으로서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당한 6년간. 토씨 하나 틀리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던 교육칙어 외우기.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악화된 교사들의 폭력. 신풍(神風)은 과학적으로 어떤 원리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냐고 담임에게 물었다가 ‘불경한 소리’라고 맞았던 과거 등을 여자는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하지만 뭣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그 정도로 군사 교육에 철저했던 선생님들이 종전을 경계로 태도가 돌변한 거였어요. 악마 같은 영미를 타도하자고 부르짖던 선생님이 바로 그 입으로 평화를 외치기 시작하더군요. 정의의 잣대를 너무나도 쉽사리 바꿔친 겁니다. 학교는 무섭다, 교육은 믿을 수 없다. 당시 전 그걸 뼈저리게 실감했어요.”
담담한 어조 속에 노여움이 담긴 여자 앞에서 고로는 슬그머니 발을 반대 방향으로 꼬았다.
하고 싶은 말은 알겠다. 이런 종류의 원한은 전에도 연장자에게서 자주 들었다. 하지만 종전 당시 아직 어렸던 고로는 공감이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의 모순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아카사카 씨는 학교를 두려워하면서도 교사의 길을 가려고 하셨죠.”
“그래요. 일본은 신의 나라가 아니게 됐고 군사 교육도 민주주의 교육으로 대체됐으니까, 저 같은 희생자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교육을 짊어지는 일꾼이 되자고 생각한 거예요.”
그렇지만, 하고 여자는 냉소했다.
“제가 너무 뭘 몰랐던 거예요. 이 나라가 그렇게 쉽게 바뀔 리 없죠.” --- p.21~23
고로는 두렁길 한복판에 멈춰 섰다. 전후 농지 개혁이 낳은 널따란 논은 차갑고 축축한 어스름 빛 속에 잠들고, 유일한 광원인 초승달도 서하늘로 기울고 있었다. 달의 둥근 곡선을 바라보는 고로의 뇌리에 지아키가 그날 떠나기 전에 남긴 말이 되살아났다.
“오시마 씨, 전 학교 교육이 태양이라면 학원은 달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태양의 빛을 충분히 흡수할 수 없는 아이들을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비추는 달. 지금은 아직 여릿한 초승달에 불과하지만 반드시 둥글게 차오를 거예요.”
태양과 달. 교육이라는 우주에 두 개의 광원이 과연 필요할까.
그렇게 의심하면서도 고로는 여자의 자신에 찬 목소리를 떨칠 수 없었다. --- p.34
“지바 전진 학원은 입시를 위한 학원이 아니야. 학교 수업만으론 부족한 아이들을 보조해서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학력을 길러준다, 그게 우리 영역 아닌가? 처음에 당신이 말했잖아. 태양이 완전히 비춰줄 수 없는 아이들을 비추는 달, 그게 학원이라고.”
억누를 수 없는 노여움을 토해낸 순간, 고로는 자신을 똑바로 보는 차가운 눈동자에 오싹했다. 마치 어둠 속에 흐릿하게 빛나는 낫 같았다.
“대체 당신은 언제까지 달이니 태양 같은 소리를 할 건데? 처음에 내가 말했다고? 그래,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언제 이야기야? 학원이 초등학교 수를 넘어선 이 시대에 태양이고 달이고 있겠어? 당신이 그렇게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겉만 번지르르한 소리를 하는 동안 난 세금 대책이랑 동업자 대책이랑 하느라 바빴다고.”
시간이 멈추었다. 아니, 자신들의 시간은 이미 오래전에 멈추었나. 고로는 미간의 주름에 울분을 담은 지아키를 외면하고 멍하니 시선을 떨어뜨렸다.
거역하기 힘든 아픔을 느낀 것은 낡은 다다미에서 잉크 얼룩 한 점을 발견했을 때였다.
머리를 흩뜨리며 등사기와 씨름하던 신혼 시절의 아내는 어디로 갔나. 함께 학원을 열자, 제2의 배움터를 만들자고 말하던, 과하게 열정적이기는 해도 아름답던 그 여자는 어디로?
“당신은 변했어.” 오랫동안 목에 엉겨 있던 한마디가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나왔다. “당신은 변해버렸어.”
“시대가 변한 거야. 당신이 변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변할 수밖에 없지. 이 학원 난립 시대를 살아남으려면 그에 걸맞은 타협과 적응이…….”
“아니, 입시 학원으로 방향을 바꾸는 건 타협이 아니야. 타락이지. 교육을 장사로만 생각하는 인간들하고 같은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뜻이야.”
“아니, 사회의 수요에 맞춘다는 뜻이야. 요새 아이들은 복습보다 예습을 원해. 입시 학원의 대두는 그걸 반영한 거야. 당신은 그런 현실을 외면하는 것뿐이야.”
“당신이야말로 야심에 눈이 먼 것뿐 아닌가?” --- p.156~157
“나 말이야, 이 업계에 들어온 뒤로 줄곧 석연치 않은 게 있었어. 왜 학원은 그냥 비즈니스면 안 되는 걸까 하는 의문.”
“비즈니스?”
“응. 가령 호화로운 요리나 보석을 고액으로 제공해도 그건 그런 비즈니스인 셈이니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지. 그런데 학원만이 유상으로 교육을 제공하는 데 대해서 묘한 죄의식 같은 지고 있단 말이지. 부유층만 다닐 수 있는 미용 관리실은 남들이 부러워하면서 비싼 학원은 비난만 해. 둘 다 고객이 있어 존재하는 건데 왜 그런 걸까 싶었어. 그런데…….”
란은 옷깃을 젖힌 검은 셔츠 밖으로 나온 고개를 움츠렸다.
“이번 일로 알았어. 아이란 건 고객이면서 고객이 아니야. 등록하고 해지하고를 결정하는 것도, 돈을 내는 것도 애들이 아니라 보호자니까. 학원에 다니는 애들 자신은 언제 어디서나 무력해. 그 점에서 다른 비즈니스하고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고 났더니,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하기가 무서워졌어.” --- p.371
“사쿠라. 사쿠라. 잘 왔다. 어디 보자, 할아버지예요.”
어리둥절한 손주를 가슴에 안은 고로는 눈썹을 한껏 내리고 “사쿠라”라고 몇 번씩 이름을 부르며 벼 이삭 같은 머리 색의 아기를 지아키에게 데려왔다.
눈앞에 내밀어진 어린 생명. 셋째 손주. 머리가 잘 움직여주지 않았다. 정리가 되지 않았다. 엉거주춤하면서도 파란 눈과 투명한 피부를 본 순간 지아키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묵직한 생명이 팔에 안겼다. 달짝지근한 우유 냄새. 졸린 얼굴에 저도 모르게 볼을 갖다댄 순간, 지아키의 뇌리에 생생하게 되살아난 것은 어머니 요리코가 갓 태어난 후키코를 처음 안았을 때 한 말이었다.
“아휴, 어쩌면 이렇게 예쁘니.”
지금도 잊지 못하는 어머니의 말을 지아키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대로 따라했다.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 p.384~385
“그러니까 이게 이 나라를 움직이는 작자들의 본심이야. 합리적이라면 합리적이지. 그치들은 일본의 활로는 그것뿐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할 거다.”
“엘리트 말고는 의도적으로 잘라내는 게?”
“그렇지. 능력 없고 재주 없는 인간들은 성실한 노동자가 돼달라 이거야.”
“능력 없고 재주 없는 인간들만이 아니야. 소질도 할 마음도 있는데 집에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학년 학생들한테 뒤지는 애도 있다고. 이 나라는 그런 애들도 잘라내는 거냐?”
이상하다. 뭔가가 크게 잘못됐다. 맥주 조끼 손잡이를 꽉 쥐는 이치로에게 마스노가 술잔을 뒤집어 흔들며 말했다.
“우에다, 나라가 국민을 지킨다는 것도 이제 쇼와 시대의 환상이야. 내 생각에 이제 일본에 그런 능력은 없어. 앞으로는 자기가 자기를 지켜야 하는 시대가 될 거다.”
--- p.416~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