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면 상승은 B.C. 8000년경에 이르러 거의 끝났다. 최대 상승 높이는 140미터, 평균 상승 높이는 약 120미터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것이야말로 지난 10만 년 동안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증기기관 발명, 박테리아 발견, 달 착륙, 그리고 20세기에 일어난 모든 사건을 합친 것보다도 영향력이 컸다. 이후 높아진 이후 해수면은 인류의 삶과 인구 폭발에 변화를 야기했다. (34쪽)
의학 분야에서만큼은 이집트인이 당대의 어느 나라보다도 앞섰을 것이다. 당시에는 의학에서도 마법과 지식이 혼재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혼합이 오히려 효능 있다고 여겼다. 인체에 관한 지식 가운데 상당 부분은 사람을 미라로 만드는 관습에서 유래했다. 해부학, 외과술, 약제학에서 이집트인은 특히 성과를 이루었고, 아마 붕대와 부목을 이용한 것도 최초였을 것이다. 치료 과정에서 이들은 약초와 채소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쥐와 뱀의 지방도 치료제로 사용했는데, 이들 하나하나의 무게와 양을 잘 재어 사용했다. 그리스의 고전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는 이집트의 의사가 최고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의학 분야에서 이들의 실력과 재주, 자부심에 대한 평판은 그때 이미 2,00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다. (74쪽)
그런데 어째서 로마는 결국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이것이야말로 역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인 동시에 정말 갖가지 답변이 가능한 문제다. 이를테면 로마 자체의 납 중독이라든지, 교외의 토양 황폐화라든지, 기독교의 대두라든지 등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훈족과 다른 이민족 침략자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사실 습격이 성공을 거둔 까닭은 부분적으로 로마의 저항이 무척 약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로마 제국은 그 내부에서부터 크게 부패한 상태였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그러나 역시 정답을 알아내기 힘든) 질문이 있다면, 이 제국이 어떻게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성장하고 쇠락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제도의 정상적인 패턴이다. (158쪽)
인류 역사를 통틀어 사람이 살지 않는 주요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 바다를 뛰어넘은 중요한 사례가 세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5만 년 전, 아시아에서 뉴기니와 오스트레일리아로의 이주다. 두 번째는 2만 년 전, 아시아에서 알래스카로의 이주와 이후 아메리카 대륙 전체로의 더딘 정착이다. 세 번째는 비교적 최근 일로, 태평양과 인도양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긴 띠를 지나간 폴리네시아인들의 이주다. 비교적 최근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이 일이 기독교 시대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주민들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었겠지만 말이다. 대양을 가로질러 새로운 땅을 향한 폴리네시아인의 항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이주의 사례다. 이 항해 중 일부는 1492년 대서양을 건넌 콜럼버스보다도 용감했다. 사실 폴리네시아인 항해자들의 진행과정과 콜럼버스의 항해 사이에는 묘한 유사성이 있다. 한쪽은 새로운 땅을 찾아 중국을 떠난 셈이었고, 다른 한쪽은 중국을 찾아 유럽을 떠난 셈이었다.(184~185쪽)
마오리족이 모아를 어찌나 열심히 사냥했던지, 1400년인가 1500년에 이르자 이 종은 거의 멸종에 이르렀다. 덕분에 모아 새끼를 주로 잡아먹고 살던 커다란 독수리(하스트수리)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결국 최초의 유럽인 정착민이 이곳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그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아오른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191쪽)
만리장성조차도 몽골족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들은 1215년에 중국 수도인 베이징을 점령했다. 물론 그 남쪽의 방대한 지역은 여전히 중국의 영토였지만 몽골족은 서서히 그곳까지 잠식해 나갔다. 몽골족이 당시 가장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던 중국을 점령한 것은 오늘날 중앙아프리카에 위치한 작은 나라가 미국을 점령하고 수도인 워싱턴에 입성한 것과 맞먹는다. (200쪽)
1348년에 유행한 흑사병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건은 아니었다. 이 전염병은 그보다 몇 세기 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도 위세를 떨쳤지만 다만 그 희생자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없을 뿐이었다. 이와 유사한 질병이 165년부터 180년경 로마 제국을 강타해 간접적으로나마 기독교의 전파를 촉진시켰다. 로마인들은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아픈 사람들에게 빵과 물을 가져다주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감명을 받았다. (213쪽)
종이와 잉크는 인쇄술보다 훨씬 먼저 유럽에 도착했다. 종이는 중국과 한국과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751년에 종이 만드는 법을 아는 중국인 장인 몇 명이 포로로 잡혀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로 이송되면서 그 기술이 중국 바깥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유럽인의 시각에서는 ‘근동중국인의 시각에서는 ‘근서라 할 만한 그곳에서 비록 몹시 두껍긴 해도 드디어 종이가 제조되었다. 이 제조과정은 훗날 아랍 세계에 전해지고, 거기서 또다시 유럽에 전해져, 당시 주로 사용되던 양피지에 서서히 도전하게 되었다. 양피지는 오로지 짐승 가죽으로 만들기 때문에 200쪽짜리 커다란 필사본 하나를 만드는 데 새끼 양 80마리쯤의 가죽이 쓰였다. 따라서 인쇄본일지라도 양피지로 만든 책은 신제품 종이 책보다 훨씬 비싸게 마련이었다. ---pp.219~220
1850년대 말 오스트레일리아의 식민지 다섯 곳 중 세 곳이 정치적 실험장이었는데, 모든 사람에게 선거권을 부여했고 아울러 비밀 투표용지에 투표할 권리며, 하원 의원에 선출될 권리도 부여했다. 당시 유럽의 다섯 강대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민주주의의 추구와 실천에서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미국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p.380
달은 오래전부터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시리아에서는 B.C. 9세기부터 초승달을 왕의 상징으로 여겼다. 이스라엘 역시 달에 근거해 달력을 만들었다. 부활절과 라마단 같은 축일의 날짜는 보름달을 기준으로 결정된다. 초승달은 이후 이슬람의 상징이 되었으며, 지금도 파키스탄과 터키, 그리고 이슬람 국가의 국기에 대부분 등장한다.---pp.448~449
20세기 말에 관람 스포츠는 애초에 계절, 달력, 안식일, 일몰 등의 원인으로 인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강력한 전깃불의 도입으로 야간경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또 지붕 달린 경기장이 건립되면서 여름과 겨울의 구분이 흐릿해졌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쇠퇴하면서 더불어 일요일이 세속화되어 쇼핑이나 스포츠 행사가 가능해졌다. 외국 여행이 쉬워지고 스포츠 문화가 확산되면서 프로 선수들은 계절의 변화를 따라 이 반구에서 저 반구로 오가며 1년 내내 경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pp.451~452
종교는 자칫 무너져버릴 수도 있는 수많은 사회에서 일종의 접합제 노릇을 했다. 강력한 군주는 종교를 지지함으로써 이득을 얻었다. 국교를 지정함으로써 군주는 오히려 자신을 신의 후예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왕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간접적으로나마 신에게 불복종하는 셈이었다. 1789년 프랑스에서, 1917년 러시아에서, 1949년 중국에서 일어난 혁명은 과거의 종교를 전복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왜냐하면 과거의 종교는 곧 과거 질서의 버팀목이었기 때문이다.
---p.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