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어긋나 흔들리던 그 땅에서 나는 도망쳐왔다. 무엇보다 그들, 자궁이라는 자연의 통로를 통해 나를 세상에 내던지고 양육하고 공부시키고 고장내버린 사람들로부터 멀리 도망쳐왔다. 그들은 분명 자기네 유전자 가운데 최악의 것, 그 찌꺼기 염색체를 내게 옮겨놓았을 것이다.
나는 이 찌꺼기 염색체에 대해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1983년 11월 중순부터 1987년 12월 20일까지 나는, 그러니까 아주 행복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만족했고, 어릴 적부터 유일하게 꿈꾸어온 그 직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소박하게 살았다. 내 직업은 펠로타 선수였다.
나는 플로리다, 정확히는 마이애미 하이알라이에서 뛰는 바스크 펠로타 프로선수단에 속해있었다. 선수들은 프론톤(펠로타 경기장 : 옮긴이)의 삼면 벽을 배경으로 춤을 추듯 뛰어올라 버들가지로 짠 큼직한 펠로타 라켓을 허공에 휘두르는 대가로 연봉을 받았다. 회양목을 둥글게 깎아 염소 가죽을 씌운 공을 라켓으로 쳐 시속 300킬로미터 속도로 세계 최대의 벽을 향해 날려 보내는 것이다. 버들가지장갑을 손에 낀 교황 백 명이 들어찬 바티칸 궁 성벽을 상상해보라. 마이애미국제공항의 비행기들이 그 벽 꼭대기를 스치듯 날아가곤 했다.
--- pp.11-12
할아버지 스피리돈 카트라킬리스가 그 무엇보다 자랑스러워한 무용담은 당신이 한때 스탈린의 주치의였고, 그 인물의 뇌조각을 훔쳐 툴루즈로 가져왔다는 이야기였다.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가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한 며칠 뒤 부검이 있었고, 주치의 가운데 하나였던 할아버지도 참여했는데, 그때 뇌조각을 몰래 잘라내 빼돌렸다가 가져왔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 모험을 감행하고 나서 한참 뒤인 1974년에 여러모로 특이한 상황에서 자살했다.
내 아버지 아드리앙 카트라킬리스도 개인의원을 운영하는 의사였고, 역시 특이했다. 아버지는 그나마 이국적인 느낌은 덜했지만 할아버지처럼 마음을 놓을 수 없게 하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종종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렸고, 뜬금없이 목청을 높여 ‘스트로피나치오’ ― ‘걸레조각’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 말이다 ― 라고 외치곤 했다.
--- p.14
영사관 출입문의 벨을 누르고 잠시 기다린 뒤 대기실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또 잠시 기다린 다음, 입을 풀로 붙여놓은 듯 말이 없는 한 남자를 따라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은 아니었고, 창고라고도 할 수 없었다. 몸을 걸칠만한 의자 하나 없었다. 창문도 환기구도 없었다. 받침다리가 붙은 등 하나가 빈 책꽂이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게 전부였다.
왓슨이 내 옆에 있었다. 움직임 없이, 세상의 중심을 응시하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출입문 밑모서리가 마룻바닥을 스치며 문이 열렸다. 아열대의 분방함을 고려하더라도 외교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한 남자가 들어서면서 불쑥 이름을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나는 얼떨결에 이름을 밝혔다. 남자는 왓슨의 존재가 마땅찮다는 듯이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말했다. “여권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남자는 여권을 받아 오듀본의 조류도감을 들여다보듯이 한참 살폈다.
“카트라킬리스 씨, 영사관에 방문해달라고 요청한 이유는 한 가지 비통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친인 아드리앙 카트라킬리스 씨의 부음을 알리고자 오시라고 했죠. 사망시각은 프랑스 시간으로 어제 오후 4시 10분이라고 합니다. 프랑스영사관 이름으로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우리도 부친의 사망과 관련된 정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는 게 없습니다만 가족상을 당한 재외프랑스인을 돕기 위해 여기 몇 가지 안내 자료와 대처요강을 준비해놓았습니다.”
--- pp.37-38
“사실, 사건 자체는 간단합니다. 다만 부친이 택한 방식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를테면 세부적인 실행방식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악마란 디테일에, 삶의 잔주름에 숨어있다는 뜻이었다. “지난 일요일, 오후 4시쯤 부친께서는 샤를드피트 거리에 있는 9층짜리 아파트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날 그 아파트에는 왕진 차 갔었다고 하더군요. 아파트 건물 4층에 거주하는 환자를 진료한 다음 곧바로 옥상으로 올라갔죠. 즉사였습니다. 보도에 세워져있던 스쿠터 위로 떨어졌어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부친께서는 일요일에도 왕진을 다녔습니까?” 그랬다. 아버지는 환자의 요청이 있을 때면 휴일에도 상관없이 왕진을 갔다. 치과를 포함해 의사들을 한데 모아 뒤섞어놓은 현대식 병원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예전 방식인 가족 주치의 역할을 좋아했다. 의사 일이 아버지에게 돈벌이 수단만은 아니었던 게 확실했다. “이상한 부분이 더 있습니다. 검시관을 무척이나 곤혹스럽게 한 문제인데, 제가 만나 뵙자고 한 이유도 바로 그 점에 대한 설명을 듣고자 해서입니다. 어떤 문제냐 하면, 부친께서 뛰어내리기 전에 취한 행위들은 제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요. 스카치테이프로 아래턱을 두상에 붙여놓았어요. 이 말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고, 아무튼 설명하기가 힘들군요. 스카치테이프 한 롤을 전부 사용해 턱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켜놓았습니다. 입을 꽉 다물어 아래턱을 올려붙인 상태에서 스카치테이프를 감아 아랫니와 윗니를 완전히 밀착시켜놓은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 pp.62-63
그 당시 우리가족의 삶을 돌이켜보면 어떤 기괴한 서커스 장면이 떠오른다. 머리가 잘려나간 닭들이 그들이 살기에는 너무 큰 집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장면이었다. 성인 네 사람과 아이 하나가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각자의 세계에 몰두해 순전히 자기 자신에게 맞춰 행복과 불행의 지대를 답사하고, 그 탐사결과에 따라 스스로 고통을 가하고 쾌락을 계발해나갔다. 나는 우리가족의 영역에서 안나 갈리에니의 진짜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늘 궁금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지만 안나 갈리에니는 부인이나 어머니 역할보다는 일찌감치 누나 역할에 전력하기로 작심했던 것 같다. 그런 결심을 하기까지 어머니의 가족사와 연관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남편과 한 지붕 아래에서, 남편의 동의하에, 남동생과 부부처럼 지내는 모습은 ― 그 기간은 1956년 2월부터 1981년 5월까지였다 ― 어쨌거나 외부사람이 보기에는 기이하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을 것이다. 우리가족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 눈에는 어머니와 삼촌이 부부 사이로 비춰졌을 테니까.
--- pp.104-105
지그비의 단호하면서도 확고한 주장과는 달리 자살성향을 결정하는 유전인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결과를 통해 확인되고 있었다. 신경계 반응조절 기능을 담당하는 신경전달 화학물질 세로토닌이 유전적 요인으로 분비장애를 일으키는 경우 자살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다른 요인도 고려해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코르티솔 같은 호르몬 분비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든지, 혹은 신경영양인자 즉 신경세포의 성장과 발달에 관여하는 일군의 단백질이 유전자에 의해 생성된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었다.
어쨌거나 이런 연구결과들은 자살 문제를 규명할 문 하나를 열어보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성과로 받아들일 만했다. 다만 내가 아는 한 아직 구성원 전원이 자살한 가족을 대상으로 연구가 이루어진 경우는 없었다. 우리가족은 뒤틀리고 손상되고 퇴화한 DNA 이중나선구조를 대를 이어 물려주면서, 세로토닌 결핍이든 코르티솔 과잉이든, 아무튼 그 반대의 경우가 아니었던 탓에 모두들 자살했다.
게다가 가족 넷이 자살했다는 보기 드문 스코어를 실현한데다, 구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 출신 계보와 가론 강 부근 출신 계보가 만나 동시에 종족퇴화를 일으키고, 자살 퍼포먼스의 품질과 창의력을 계속 향상시킨 가족이 과연 있었을까? 사실 나의 가족들을 돌아보자면 구성원들 모두 공통적으로 자살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넘어 각자 마지막 장면을 화려하게 연출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일종의 쇼 비즈니스 유전인자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pp.129-130
1974년 2월, 스피리돈 할아버지는 카트라킬리스 가족의 최고연장자로서 남아있는 구성원들에게 하나의 행동표본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기라도 한 듯 자살로 생을 마쳤다. 할아버지의 자살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도 없었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루어졌는데, 이런 방식이 그 후 우리 가족에게는 하나의 규칙이 되다시피 했다. 그 당시 할아버지의 나이는 모스크바에서 가져온 몇 가지 문서자료로 추정하건대 74세 아니면 75세였다.
아버지는 그날 오후 늦게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랑파르생테티엔 거리에 있는 생테티엔대성당에서 가까운 경찰서였는데, 할아버지가 자살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할아버지는 중세시대 빼어난 건축물인 그 대성당의 고딕식 첨두아치 바로 아래에 앉아 당신이 좋아한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방식 그대로 가슴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할아버지는 모든 무게를 털어낸 궁륭이 대성당 일부에 공존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에 금을 그으며 까마득히 솟구쳐 오르기 직전의 지점을 죽음을 위한 공간으로 선택했다.
할아버지가 사용한 리볼버의 출처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벨기에 나강 형제의 이름을 딴 나강 리볼버였는데, 그들 형제가 소련군을 위해 제작한 권총이었다. 방아쇠를 당기면 실린더가 함께 당겨지는 형태로, 특히 20년대 초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의 정치경찰 엔카베데(NKVD)에 보급된 모델이었다.
과거 한때 공산당 중간간부로서 줄곧 신 없는 세계에서 살아온 할아버지는 크렘린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대성당의 저녁예배시간을 택해 숨을 거두었다. 살아내야 할 의무적인 시간을 다 채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pp.153-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