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진 또 다른 문제는 잘못된 것들을 수집하여 잘못된 일에 사용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관한 '사실'을 수집한다. 그런 다음 그 사람 자체보다 모은 사실들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사실을 열심히 수집한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지식만 쌓을 뿐, 그 지식으로 무언가를 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에 대해 수집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내보이는 게 고작이다. 하나님께서 그 일에 감동받으실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평생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듣고, 수없이 많은 성경공부에 참석한다. 하지만 숱한 설교와 성경공부도 우리가 변해야 할 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만 소용되는 경우가 있다.
교회에는 성경퀴즈 대회에 나가 우승할 만한 사람들로 넘친다.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된 사건의 기록을 기억하고 수집하는 데 열심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의 진정한 차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느 작은 마을의 식료품점 앞에서 두 여자가 환담을 나누고 있다. 그들은 일간지에 실린 연예인인나 유명인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A라는 사람 이야기 들었어요? 임신했다지 뭐예요! B는 이혼 서류에 잉ㅋ도 마르기 전에 다른 여자와 결혼했대요. 세상에 C는 암에 걸렸다고 하네요."
두 여자의 말만 들으면 그들이 마치 그 유명인사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자기가 말한 사람들을 전혀 모른다. 모두 오늘자 일간지에서 읽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한 여러 '사실'을 알고 나니, 마치 자신이 그 유명인사와 알고 지낸 듯한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든 다른 사람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정보의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다. 그 말씀은 절대적으로 정확하며 오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 오직 말씀에 대한 지식만 쌓으면 족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둘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다. 따라서 그 중 한 가지만 추구한다면 아무리 배워도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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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추억해보기 좋아한다. 그 보석 같은 기억 가운데서도 나는 오랜 여행 끝에 막내딸과 현관에서 재회하던 이 장면을 가장 아름답게 기억한다.
하나님을 쫓아가서 마침내 하나님을 잡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막내딸이 통학버스를 내려 나와 만나기까지 우리 둘은 비슷한 과정을 밟는다. 그때의 장면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막내딸은 스웨터를 걸쳐두었던 가방을 땅에 질질 끌면서 버스에서 내린다. 그래서 스웨터가 한 철이면 다 닳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딸은 친구들에 둘러싸여 조잘거리면서 이쪽으로 걸어온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현관 엎에 서 있다. 딸이 나를 발견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를 본 순간, 막내딸은 친구고 뭐고 다 잊고 크게 소리친다. "아빠, 아빠, 아빠!"
가방에 걸쳐두었던 스웨터가 땅에 떨어진다. 곧 가방까지 땅에 내팽개친다. 이제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딸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몇 주 동안 아빠의 사랑을 그리워하던 아이가 필사적으로 내 품안에 뛰어 들어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잔뜩 흥분한 딸의 얼굴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해낼 수 있다. 아빠의 깜짝 등장에 아이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한다.(...) 둘은 포옹하기 전,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기뻐하며 그 순간을 몇 초 가량 더 즐긴다. 마침내 막내딸이 와락 내 품에 안긴다. 아이를 번쩍 안아 공중에서 몇 바퀴 돌리면 아이는 소리 지르고 깔깔거리며 좋아한다. 딸을 바닥에 내려놓자, 아이는 나에게 뽀보하려 달려든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딸에게서 몸을 돌린다. 무엇 때문일까?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다. "딸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뽀뽀하기 싫단 말입니까?"
물론 아니다. 나도 아이에게 뽀보해 주고 싶다. 하지만 내가 돌아서서 집으로 들어가면, 딸이 부리나케 쫒아와 더 강렬하게, 더 많이 뽀뽀해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점을 노렸으니, 이것은 일종의 치밀한 작전인 셈이다. 나는 결코 딸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더 큰 기쁨을 맛보기 위해 잠시 돌아설 뿐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시다. 하나님은 늘 우리 주변에서 서성이고 계시다. 만남의 기쁨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주일 아침, 잠깐의 짧은 뽀뽀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내가 딸에게서 돌아서는 순간, 딸은 특유의 표정을 짓고 아주 단호한 기세로 이렇게 말한다. "아빠한테 뽀뽀하고 말 테야!" 이렇게 해서 둘 만의 뽀뽀 실랑이가 시작된다. "안돼! 아빠한테 뽀뽀하면 안돼! 네 얼굴을 봐. 온통 먼지투성이잖니? 에구 더러워라. 아직 뽀뽀하면 안돼!" "아니야, 아빠한테 뽀뽀할 거야! 아빠한테 뽀뽀하고 말 테야!" "안돼! 뽀뽀하지 못할 걸!"
딸은 나에게 뽀뽀하려고 굳게 결심했다. 그런 딸아이를 피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큰 몸집을 잽싸게 움직여가며 이리저리 딸을 피한다. 아빠는 피하고, 딸은 쫒는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몇분이 지나자 딸은 지쳤다. 그러면 그 애는 더이상 나를 쫒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애원하는 말투로 말한다.
'아빠, 제발!"
내가 실제로 딸에게 잡힌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는 이 한마디로 나를 쉽게 사로잡는다. 아이는 나를 붙잡을 수 있을 만큼 빨리 달리지 못하지만 말로 내 가슴을 금세 사로잡은 것이다.
혹자는 내가 '하나님을 좇는 자'란 용어를 사용한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을 좇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무슨 뜻인지 이해는 가지만, 내 의견은 조금 다르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그것은 그리 큰 의미가 없다. 나는 이미 그 애의 아빠이니 막내가 나를 자신의 아빠로 만들기 위해 좇을 필요가 없었다. 단지 같은 집에서 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바라서 요리조리 피하는 아빠를 필사적으로 좇는 것이리라. 당신은 하나님의 집에서 사는 데 만족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하나님의 무릎 위에 앉고 싶다!
인간이 어찌 하나님을 잡을 수 있을까? 잡을 수 없다는 데 반론을 제기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동(東)이 서(西)에서 먼 것같이 하나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너무도 다르다. 인간이 아무리 육체적으로 노력하고, 정신 수련을 쌓고, 영적으로 분발한다 해도 하나님을 잡을 수는 없다. 인간의 행위로는 하나님을 잡을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매달릴 경우 사정이 달라진다.
우리가 완전히 절망하여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을 때, 막내딸이 그랬던 것처럼 "아빠, 제발!" 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잡혀주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잡을 수 없던 하나님의 마음이 이 말 한마디에 녹아버리는 것이다. 일단 이 단계에 도달하기만 하면, 당신이 좇던 그분이 이제는 거꾸로 당신을 좇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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